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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사진

연아사랑(부여정림사지)


 

정림사지 5층 석탑

기초적인 내용 몇가지

    위치: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건립시기:7세기 중반

    크기:현재 높이 8.8m

    국보 9호

    특징:백제 석탑의 정형화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석탑임

탑이란

정림사지5층탑불교 미술 가운데 양과 질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탑파와 불상이다.  이는 탑파와 불상이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서 불교 신도들의 신앙과 정성이 모두 이 두곳에 결집되었던 때문이다.  탑파는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하였기 때문이며 불상은 직접 예배를 올리는 대상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탑파와 불상이 가장 뛰어난 불교 미술로서 한국의 고대 미술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전국의 탑파는 천 수백 기를 헤아릴 수 있는데 이 천기가 넘는 탑은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 목조탑파, 전조탑파(벽돌탑파), 모전석탑(벽돌 모양의 돌로 쌓은 탑), 석조탑파, 청동탑, 금동탑 등으로 구분한다. 탑파란 탑이라고도 하고 스투파라고도 쓰는데 스투파란 사람의 뼈를 담고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묘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시 말해 탑파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건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탑파 또는 불탑이 석가모니 곧 불타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라고 말하는데 대하여 승려의 사리를 모신 탑도 또한 사리탑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경우 불탑과의 구별은 어떻게 하느냐의 의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탑이란 교주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므로 불가에서는 가장 존엄한 존재이고 예배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사찰 경내의 중심부 곧 법당 바로 앞에 건립하여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하여 승려의 사리탑은 부도라 하여 불가에서의 숭배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라도 신앙의 중심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사찰 경내에서는 벗어난 한적한 곳에 건립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사리탑은 세워진 위치로 우선 구별된다.  그래서 각 사찰에서는 승려의 부도들을 되도록 한 장소에 모아 부도군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탑이 발생하게 된 연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제자들이 유해를 화장하여 사리를 수습했는데 인도의 여덟나라가 그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자 제자인 도로나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 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 또는 사리팔분이라고 하였다.  이 때 세워진 초기 탑은 반구형을 이루어 마치 무덤과 같은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이렇듯 최초의 탑 들은 원형의 봉분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그 밑에 높은 기단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상륜도 그 수효가 늘어나는 한편, 주위에 돌난간을 둘러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놓았다.

우리 나라 석탑의 발생

불탑은 그 재료에 의하여 목탑, 전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 석탑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목탑은 전쟁등으로 모두 타버리고 고대에 만들어졌던 목탑은 실물이 없다.  
  현재 볼 수 있는 목탑은 조선 후기 17세기 초반의 건축물인 충북 보은 속리산의 팔상전이 유일한 목조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아 석탑이 크게 발전하였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1천여기에 달하는 탑들이 거의 석조탑이다.  반면 일본은 현재까지도 풍부한 목재를 이용해 탑을 건립하여 목탑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탑을 만들었을까?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부터로 추정한다.  즉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말엽까지의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 시기로서 이같은 목탑의 경영과 그 전통의 연마가 드디어는 석탑을 발생하게 하였다.   특히 백제는 석탑 건립의 선진국으로 일본이나 신라 탑 건축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정림사지 석탑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5층탑

부여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정림사지는 백제인에 만든 2개 남은 석탑중 하나가 위치한 절터이다. 백제 시대에는 이 절터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발굴 작업 중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 조각에 정림사라는 사찰 명칭이 있어 그렇게 불리울 뿐인데 삼국유사에는 정림사가 출현하지 않아 삼국시대의 이름은 아니다.  그러면 탑은 분명 백제인이 만든 탑이고 왕궁이 있던 곳에 세워진 사찰이니 상당한 규모였을 이 절의 백제 이름은 무엇일까?  탑이 말을 하지 않는한 어찌 알수 있겠는가?  
  정림사지가 있던 곳은 부소산과 왕실 연못이었던 궁남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위치상으로 보아 상당히 중요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현재는 탑만 덩그런히 서있을 뿐이다.  뒤쪽에 위치한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그 안에는 고려때 만들어진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그나마 머리 부분은 훗날 연자 방아돌을 깍아 다시 올려놓은 것인데 좌대(받침돌)부분의 연꽃 문양이 그 석불의 아름다움을 증명해 줄 뿐이다.  백제 지역 답사를 다닐 때 마다 전쟁에 패해 망한 왕조가 어떻게 역사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질 수 있는지 세삼 뼈저리게 느낀다.  모든 것이 정확하지 않고 단편적인 것뿐이라 수천조각으로 나뉘어진 그림 맞추기 게임에 서너 조각가지고 전체 그림을 알아 내야하는 것과 같아 오로지 답답할 뿐이다.
  정림사지 석탑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탑의 양식을 가지고 추측해 보건데 익산 미륵사지석탑보다는 후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미륵사지가 목탑의 양식을 대체적으로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면 정림사지는 목탑의 모방에서 한단계 발전해 석탑의 조형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탑을 제작할 때 초기에는 나무로 목탑을 만들고 그 이후에 석조탑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익산 미륵사가 백제 무왕조(600-641)에 만들어진 것이니 정림사지 석탑은 그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7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백제인의 건축기술이 상당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증명되고 있다.  특히 돌을 다루는 기술은 삼국중에 으뜸이었다.  고구려인들은 석탑을 만들지 않았고 신라인들은 초기에 벽돌모양으로 다듬은 모전 석탑(벽돌모양을 모방한 돌탑)을 만들었는데 재질은 화강암이 아니다.  경주의 분황사 모전석탑과 부여 정림사지석탑이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비교해 보면 그 기술적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 뛰어난 돌기술자였던 백제인들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이다.

정림사지5층탑

불에 그을른 흔적

소정방 평제비문

불에 그을른 흔적

소정방 평제비문

정림사 5층 석탑은 미륵사터 석탑 보다 규모가 1/3정도 이다.  미륵사탑이 목조 건축 양식을 그대로 돌로 표현해 놓았다면 정림사지 석탑은 그 형상미를 한단계 승화시켜 단아하면서도 절제된 석탑의 모범을 보여준다.  한국 석탑은 이후 정림사 5층 탑의 구조를 그대로 계승발전시킨다.  따라서 이 탑은 한국 탑의 모범이며 그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신라는 분황사 모전석탑으로부터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감은사터 오층석탑 및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 삼층석탑에 이르러 석탑양식의 신라 형태가 정착되어 진다.
  정림사 5층 석탑은 잘 다듬어 마름질한 화강석재 149매를 잘 짜맞추어 올린 높이 8.33m의 탑이다.  석탑의 정형화된 모습이 담긴 탑이지만 목조탑에서 보여주는 가구적인 수법이 그대로 계승되어 목조탑이 석탑으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5층탑

정림사지 석불좌상

정림사지 석불건물

현재 국보 제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한 때는 1층 탑신에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신라 연합군과 함께 백제를 점령한 후에 그일을 기념하기 위해 남긴 비문으로 인하여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 오해되었으며 또한 평제탑(백제를 평정한 탑)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간의 학술 조사와 연구 결과에 의하여 그 오명을 벗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정림사탑은 백제의 패망 역사를 잘 보여준다.  탑의 1층 면석에 있는 소정방의 백제 평정 내용이나 겉에 남아있는 그을름이 그것이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점령당했을 때 1주일 밤낮으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하니 그 참상이 어떠했겠는가?  그때 입은 상처를 정림사석탑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탑은 그 때 그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탑이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당시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소정방의 정이 자신의 몸에 치욕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면....
  2층 기단부 위에 5층으로 쌓아올린 정림사탑은 지붕돌과 그 받침(옥개석과 받침)의 수법,  기둥돌(우주)의 배흘림 기법 등이 목조탑의 모양을 계승하고 있지만 간략화된 몸체와 규모 등이 석탑의 변화된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륜부는 사라졌고 5층 사리함은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다.   이탑을 보신 분은 그 아래녂에 있는 익산 미륵사지 탑도 같이 보면 좋을 것이다.  백제 인의 숨결이 담긴 둘남은 탑들이다.  차로 달리면 1시간 남짓 거리이다.(출처:이승훈의 신한국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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