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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대나무숲이 고인돌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아래에는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서 있어 고인돌의 뛰어난 위용(偉容)이 반감(半減)되었지만 한때 이 지방의 명물이자 기념비적 구조물의 역활을 하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는 훤출한 인상(印象)의 고인돌이다. 그만큼 "일명 망북단(望北壇)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는 이 지석묘는 병자호란 때 이 마을에서 태어난 송기상(宋基想 ,1612-1667)이 의병봉기하여 진군하던 중 굴욕적으로 화의(和議)되었음을 알고 이곳으로 되돌아와 호국충절을 다지며 평생토록 망북통배(望北痛拜)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상높이 약 1.9m, 너비 2.5m에 25Cm 정도의 균일한 두께의 오각형과 장방형 굄돌 두 장을 65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가로 3.44m, 세로 2.9m, 두께 60Cm 정도의 판석을 얹었다. 전체 높이는 2.5m 로서 좁은 폭을 가진 길죽한 무덤방을 만들었다. 이러한 길고 좁은 공간에다 그 중간을 키가 큰 사람이 서서 지나다닐 정도로 높은 무덤방은 무덤방이라 하기에는 별 쓸모가 없는 공간을 만든 셈이다. 단지 외관상으로 기묘한 기념비적 구조물을 만들 목적이었다면 몰라도 이것이 죽은 자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무덤이라 생각하기는 힘든 모습이다. 전체적인 비례 또한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와는 무덤방의 높이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지금의 지표면이 원래 그대로일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여하튼 지금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선 생각되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 시신을 그 좁은 무덤방에 안치하였느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 거대한 규모의 고인돌에서는 시신(屍身)을 그대로 뉘어 안치(安置)할 수 있을 정도로 넓기는 하지만 거의 한둘에 해당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탁자식 고인돌은 일반 신장(身長)에 비해 무덤방의 규모가 작다. 그래서 탁자식 고인돌의 장법(葬法)은 초분(草墳)이나 세골장(洗骨葬) 등의 방법으로 삼년장 등의 기간 동안 시신을 삭인 후, 유골을 추려 나중에 무덤방에 안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여기에 쓰인 돌은 각기 균일한 두께를 갖고 있는 점판암 종류로서 굄돌의 표면은 마치 무쇠를 망치로 수없이 두드린 듯이 둥글둥글하게 눌러져 있다. 아마도 돌의 재질이 원래 그러한 것 같았으며, 들쑥날쑥한 절개 부분은 서쪽에 두고 반반한 절개면은 동쪽으로 배치하여 동쪽에 대한 배려가 옅보인다. 또한 여기의 덮개돌 또한 '강화지석묘'의 경우처럼 동쪽 부분에서 덮개돌이 굄돌에서 벗어나 지붕 처마처럼 비죽 튀어 나와있으며 서쪽의 부분은 아래 굄돌과 비슷하게 처리하였다. 곧 황해도나 강화도의 대형 고인돌에서 볼 수 있는 "ㄱ" 자형(字形)으로서 튀어나온 덮개돌이 동물의 머리와도 같은 모양새이며, 동서의 방향에서 보았을 때는 사진에서 보듯이 "ㅠ"자형(字形)이다. 물론 여기에 동서의 마구리(막음돌 또는 마감돌)만 있으면 완벽한 고인돌이 되지만 현재는 유실(流失)되어 마감상태를 알 수 없다.
재 6대를 이어 살고있는 정복순 할머니의 집 뒤 장독대 옆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인돌은 흙 언덕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한 상태로 세워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금시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할머니의 6대 조상에서부터 현재까지 변한것 없이 그대로 라고 한다. 보통 한 대(代)를 20년에서 30년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를 감안하여 보면 최소한 약 120년에서 최대 210년 전에도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단지 고인돌 지반 앞으로 돌을 쌓고 시멘트를 덮어 붕괴를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과거에도 이와같이 고인돌 앞의 돌더미가 쌓여 있었으며, 비록 돌더미는 무너져도 고인돌이 기울거나 기타 이상한 징후는 없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고인돌 앞에 돌더미에 덧씌운 시멘트와 고인돌의 굄돌 사이가 균열되어 금이 가 있으며, 고인돌의 지반은 붉은 황토로서 표토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지표와 닿아있는 굄돌의 하부 외곽선은 보여지는 만큼 굄돌이 땅속으로 깊게 묻혀있지 않다는 점을 역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지금의 지표면이 과거와 달랐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몇군데의 탁자식 고인돌의 무덤방 규모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워낙 불규칙한 대상이므로 아래 도표의 수치에는 어느 정도 오차가 있다.)
이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여기의 도산리 고인돌은 비정상적으로 무덤방이 높으며 또한 굄돌의 옆모습이 오각형으로서 다른 탁자식 굄돌의 옆모습은 반달형이나 사달꼴인데 비하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굄돌의 지상 높이가 무덤방의 폭이 비슷한 포천 수입리의 경우와 비교하여 무려 1m 정도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오차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략 60~70Cm 정도는 흙으로 더 파묻혀 있어야 다른 고인돌과 비슷한 비례를 갖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굄돌은 서쪽으로 비죽 튀어나온 부분이 지표면과 맞닿으면서 사다리꼴의 안정된 모양이 되며, 구조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완벽한 탁자식 고인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종합하여 볼 때, 지금 현재의 상태는 굄돌의 대부분이 지표 위로 드러나 있는 매우 아슬아슬한 상황으로 거의 붕괴(崩壞) 직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잔존(殘存)하는 탁자식 고인돌의 대부분은 지표면의 토사가 거의 유실되지 않는 위치에 있다. 그만큼 탁자식 고인돌의 입지선정(立地選定)은 주변환경과 자연적인 역학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하고 고려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많은 토사가 유실되었기에 아마도 과거 어느 시기에 인위적으로 고인돌 주변의 토사를 파낸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 거대한 고인돌 옆에는 너비 2~3m의 평평한 바위 3개가 놓여 있는데, 과거에는 장독대로 사용하였다 하며, 이중 하나의 반석(盤石) 밑에는 둥그런 돌이 드러나 있다. 나머지는 굄돌이 보이지 않지만지금의 상황이 바둑판식이거나 최소한 개석식 고인돌일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다. 이곳 주민의 말을 빌리면 이 근처에 산재하고 있는 고인돌의 석재들은 이 부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만큼 여기의 반석들은 나름대로 특별난 이유에 의하여 이곳에 설치되었으며, 이것들이 고인돌일 경우, 다른 양식의 고인돌이 함께 모여있는 매우 특별난 상황인데다 건너편 매산리, 상갑리 일대의 수많은 고인돌 떼와는 규모와 외관에서 확실하게 구분이 되는 매우 독특한 지석묘군으로 아마도 이 지역의 지배계급이 묻혀진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여기 같은 장소에 모여있는 고인돌들은 어쩌면 일부다처의 관계나 가족무덤인지도 모르겠으나, 이 반석들의 외양이 건너편 상갑리 일대의 고인돌과는 다르고 오히려 강화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판석형 덮개돌과 흡사하여, 강화도 지역에서 엿볼 수 있는 계급의 분화를 여기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강화도에서는 구별되고 차별된 부류가 여기서는 같은 계급이나 신분으로서 같은 구역에 있으며, 그런 만큼 개석식 고인돌의 부류가 여기서는 지위가 상승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혼재(混在) 양상은 건너편 죽산리 매산마을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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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도산리에는
동서로뻗은 나즈막한 구릉을 끼고 그 남향 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꼭대기 능선에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과 함께바둑판식 또는
개석식(蓋石式)이라 여겨지는 고인돌들이 한군데에 모여있다. 특히 여기의 탁자식 고인돌은 알고있는 바로는 한반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전형적인
탁자식(일명 북방식이라고도 함.)으로 그 규모와 독특한 축조방식이 눈에 띄는 매우 특출한 고인돌이다. 행정지명으로는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지동마을에 속한다.
무덤방의 방향은
거의 정확하게 90, 270도의 동서를 축으로 하고있으며
또한 여기에서는
유일하게 탁자식 고인돌의 이음새 처리 방법을 엿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