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유람처, 풍악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강산’이 지금의 금강산이
아님을 확인한 후, 이번에는 금강산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풍악’으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없고
<삼국유사>에는 3건이 나왔습니다.
법주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진표율사가 통일 신라 때 개골산에서 발연사를 세우고
법회를 열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제목은 풍악으로 되어 있었지만 내용에는 개골산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 금강산의 당시의
이름입니다.
또 하나는 ‘풍악은 옛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은둔하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산이 깊고 아름다우니
세상을 떠나 은거하기에는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이고,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산악숭배사상이나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국어시간에 배운 적이 있는 향가인 융천사의 ‘혜성가’에 대한 설명에서 나왔습니다.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 등 화랑의 무리 세 사람이 풍악에 놀러 가려는데 혜성이 심대성(별자리 중 하나)을 범했다. 그래서 낭도들은 이를 의아히 여겨 그
여행을 중지하려 했다. 그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서 그것을 불렀더니 별의 괴변은 즉시 없어지고 왜구가 제 나라로 돌아감으로써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은 기뻐하여 낭도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
|
| ▲
전자도서관의 번역본 <삼국유사>에서 ‘풍악’으로 검색한 모습 |
|
| ⓒ2005 백유선 |
| 본래 화랑은 명산대첩을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수련했던 무리인 만큼
이때 이미 풍악(금강산)은 명산으로서 화랑들의 유람처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이러한 점 때문에 화랑은 자연을 중시하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우리 전래의 산악숭배, 신선사상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삼국시대와 후기
신라(전 개인적으로 '통일 신라'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는데 통일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요.
오히려 우리 스스로 고구려를 멀리하는 표현인 것 같아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정착된 단어는 아니지만 전 앞으로는 '후기
신라'라고 쓰려고 합니다) 때에는 금강산은 풍악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의 태자가 은거한
개골산
이번에는 ‘개골산’으로 검색을 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한 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앞의 진표율사와 관련된 기사의 본문에 하나가 검색되었고, <삼국사기>에는 잘
알려진 마의 태자 이야기에 나옵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려고 하였습니다.
왕자가 이에
반대하여,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이 있습니다. 단지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麻衣)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삼베옷(麻衣)을 입고 지냈다고 하여 흔히 '마의 태자'라고 하지요.
 |
|
| ▲
<삼국사기> 원본의 마의태자 관련 기사에 나오는 '개골산'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이 개골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미 이때 금강산은 은거하기에 알맞은
장소로 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산 중에서 다름 아닌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니까요. 지금도 금강산에는 마의 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마의 태자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묘까지 있다고 합니다.
신라의 소사 지역,
상악
그 외 ‘상악’으로 검색하니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제사와 종묘제도를 설명하는 내용 중에 한 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신라는 사직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지요. 신라 때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는 크게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되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제사가 대사입니다. 그런데 금강산 즉 상악은 소사를 지냈던 곳입니다.
이로 보아 금강산은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시 하던 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신라 5악이라고 하여 동은 토함산, 남은
지리산,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 중은 팔공산으로 이 다섯 곳의 중요한 산은 대사, 즉 가장 큰 제사를 지내던 곳입니다. 신라의 국토를
중심으로 보자면 이곳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강산은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경치 좋은 명산, 은둔하기
좋은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국가적으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여 곳이 넘는 소사 지역의 하나로 겨우 포함될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조선시대의 5악에는 금강산이 포함이 됩니다. 5악의 중앙은 삼각산, 동악은 금강산, 남악은 지리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이었습니다.
결국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토대로 보면, 삼국시대와 후기 신라
때까지는 금강산은 지금의 금강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산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이 시기 금강산의 명칭은 풍악, 상악,
개골산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보살이 머무는 금강산
금강산이 금강산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금강이란 말은 금속처럼 빛나고 단단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는 부처의 지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금강산’은 ‘담무갈 보살이 1만2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머물고 있는 이상향 중의 한 곳’을 말합니다.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이들이 머무는 곳을 ‘동해의 금강산’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금강산이란 산 이름이 나오는
<화엄경>은 7세기말 당나라 때 번역되었는데, 8세기 당나라의 승려 청량국사 징관은 이 책을 풀이하면서 ‘동해의 금강산’을 우리
나라의 금강산으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이 알려진 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금강산이란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만들어지고 불교가 한창 발전하고 있던 후기 신라 때의 일입니다. 아울러 금강산은 새로운 불교의 성지, 불국토로
인식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금강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비로봉인데 이는 <화엄경>의 중심 부처인 비로자나불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또 흔히 말하는 금강산 1만 2천봉이란 말도 1만 2천 보살을 비유한 데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금강산이란 이름은 불교적인 명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엄경>의 내용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런 내용의 기사가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의 책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는 금강산은 14건, 개골산은 1건이 검색되었습니다. 즉 금강산이란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즉, 고려시대부터는 금강산이란 이름이 공식 명칭으로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사> 지리지의 금강산
항목에는 “풍악 또는 개골산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무수한 봉우리가 눈 속에 솟아 있는데 높고 험한 모습이 비할 바 없이 기묘하며 절이 매우
많다. 이 산에 대한 소문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풍악, 개골산이란 이름을 대신하여 불교적인 명칭인
금강산이 공식 명칭이 되었음이 확인됩니다.
 |
|
| ▲
<고려사>의 ‘금강산’ 관련 내용. 금강산이란 제목 아래 ‘풍악이라고도 하고, 개골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한편 <고려사>에는 개골산에 은둔했다는 내용, 금강산에 숨어
들어갔다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신라 말 마의태자처럼 숨어 은둔처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심지어는 중국황제가 금강산에 귀양을 보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역시 같은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려사>의 기사 중에는 금강산을
삼신산으로 묘사한 경우가 있습니다. 신선사상에 의거하여 금강산을 삼신산 중의 봉래산으로 부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오선봉,
구선봉, 삼선암, 구룡연 등 불교와 무관하게 자연 지세를 따르거나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름이 남아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엔 ‘다이아몬드 마운틴’
이제 다양한 이 금강산 이름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막연히 암기해선 오래가지 못하겠죠? 개인적으로 한자의 일상적인 사용을 찬성하지는 않지만, 금강산의 이름만은 한자 뜻풀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풍악이란 이름은 단풍나무 풍(楓)자를 써서 가을이면 온통 단풍천지로 되는데서 유래한
이름이고, 개골산이란 이름은 모두 개(皆), 뼈 골(骨)자를 써서 겨울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흰눈에 덮인 기묘한 바위들만 우뚝 솟아있는 것이
마치 뼈만 남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상악이란 이름은 서리 상(霜)자를 써서 새하얀 산봉우리가 서릿발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
|
| ▲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 바위가 솟아있는 것이 마치 뼈만 남은 것 같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계절에 대한 금강산의 별칭이 널리 사용된 것은 대체로 조선후기 무렵의 일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풍악, 개골산이 가을과 겨울의
특징을 반영하여 불린 이름인 만큼, 쑥이 무성하다는 뜻을 가진 봉래는 신록이 우거진 여름에 비유하여 여름산의 이름으로, 금강산은 꽃피는 금강산의
화려함을 봄에 비유하여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금강산의 이름을 살펴보면, 풍악, 개골산처럼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으로서의
이미지를 생각하여 붙인 이름에서부터, 불교식 이름인 금강산, 그리고 신선사상에서 유래한 봉래산 등 다양한 이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지금은 불교식 명칭인 금강산이 공식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영어식 표현은 무엇일까요? 금강은 다이아몬드이니, '다아몬드
마운틴'이라고 합니다.
금강산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금강산을 보기 전에는 천하의 산수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됩니다. 아울러 전국 각지에 금강산에 비유한 명승지의 별명이 생겨납니다. 해서금강(장수산), 함경금강(칠보산), 의주금강(석숭산),
동래금강(금정산) 등…. 이 외 수많은 명승지에 소금강이란 호칭이 붙기 시작합니다. 금강산이 얼마나 빼어난 산이었나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됩니다)
백담사와 전두환 그리고 한용운
예정된 2월 3일 아침 8시 금강산행 버스는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육로 관광이 시작되면서 수로 관광은 실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 금강산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양평·홍천·인제를 거쳐 고성 통일 전망대에 설치된 출입국관리소를 통해 휴전선을 넘어가게 됩니다.
잠깐 조는 사이에 버스는
어느덧 백담사 입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설악산 백담계곡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백담사에 갔던 기억이 났습니다.
작은 사찰인
백담사는 무엇보다도 전 대통령인 전두환씨가 이곳에 유배된 후로 널리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죠. 10여 년 전에 방문했을 때에도 전씨가 머물렀던
방을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객을 불러들인 기억이 납니다. 그 후 특별한 일이 없으니 지금도 그런 모습은 큰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사실 백담사는 일제시기 항일 승려로 이름을 떨친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의 시 '나룻배와 행인'을 새긴
한용운의 시비도 있지요. 그러나 전씨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보니 한용운은 곁가지로 머물고 말았었죠.
요즈음에는 전씨의 가치가 점점
떨어져서인지 한용운 스님을 기리는 사업이 다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이곳에 한용운 기념관을 세운다는 이야기도
언론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쪽 유일의 금강산 사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어느덧 차는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다 보니 건봉사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었습니다.
건봉사는 금강산 사업이 시작되기 전
남한에서 가볼 수 있었던 유일한 금강산 사찰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금강산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금강산 건봉사라고 불려 왔습니다.
13년 전 처음으로 건봉사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전에는 다른 금강산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큰 규모였으나, 전쟁 중 파괴되어 나중에 세운 조그만 전각 하나만이 겨우 사찰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방문해
보았더니 일부 건물들이 복원되어 제법 사찰의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13년 전만 하더라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큰길에서 건봉사까지는
비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길도 엉망이어서 도저히 승용차로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차를 세워두고 2~3km 정도를 걸어서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절 입구에는 그곳부터 민통선임을 알리는 푯말이 서 있어서 꽤 긴장하며 절 구경을 하였습니다. 바로 위쪽이
휴전선이라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지요.
 |
|
| ▲
건봉사 입구의 민통선임을 알리는 표지판. '이곳은 민통선 북방지역이므로 사찰내에 한하여 자유로이 이용하고...' |
|
| ⓒ2005 백유선 |
|
 |
|
| ▲
건봉사 일주문.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건봉사의 유일한 건물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이곳에서 불기 2955년으로 표시된 돌솟대를 보고 실제 불기와 몇 백 년
차이가 나는 것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구경 온 스님에게 물어 보았더니 잘 모르더군요. 이곳에 거주하던 스님 한 분이 답을
주었습니다.
석가모니 입멸 후 점을 찍어 연도를 표시하다 보니 생긴 오류라고 하더군요. 최근에야 다시 알게 된 내용이지만 석가모니
탄생과 입멸에 대한 기록의 부재와 연도표시의 오류에서 생긴 일이며, 이제는 국제적으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불기 연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
| ▲
건봉사 돌솟대. 불기 2955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는 1960년대 이전에 사용하던 불기 연도 표기법에 의한 것으로 현재 사용하는 불기
연도와는 몇 백 년 차이가 납니다. 요즈음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연도 표기법에 의하면 올해는 불기 2549년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금강산의 사찰을 돌며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한
사명대사의 비였습니다. 13년 전 처음 보았을 때는 일제에 의해 세 조각이 난 채 땅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몇 년 후 다시 와보니 복원되어
있더군요.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
|
| ▲
건봉사 사명대사비. 일제가 이렇게 파괴한 후 오랫동안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복원된 건봉사 사명대사비. 다소 어설픈 모습이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지금 생각하니 이때 금강산에 처음 와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곳은 금강산의 초입에 해당하고 절 이름도 금강산 건봉사인 것처럼, 넓게 보아서는 금강산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차는 화진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군 휴양소로 지정되어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었던 곳인데 일반인에게 공개되면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김일성 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더구나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도 남아 있습니다. 구태여 이곳 경치의 아름다움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통치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전 38선 이북이었던 이곳이 전쟁 후 남한의 영토가 되면서 남북 지도자의 별장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거죠. 최근에 김일성 별장을 보수, 수리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억으로 이곳 별장에서 찍은 김정일의 어릴 적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휴전선은 없다
백담사, 건봉사, 화진포 모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차는 이내 점심 식사가 예정된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습니다.
식사 후 통행증을 받기까지 약 1시간 이상
자유시간이 있었습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이곳의 경치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1시간이 꽤 아쉽게 생각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화진포나, 아니면 출입국 관리소가 있는 통일 전망대에서 시간을 보내게 했으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
| ▲
금강산 콘도에서 본 겨울 바다 |
|
| ⓒ2005 백유선 |
| 출입국관리소가 있는 통일 전망대에도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망원경을 통해 또는 육안으로 금강산을 바라보았던 아쉬움이 기억납니다. 멀리 보이는 낙타등처럼 보이는 구선봉과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로 알려진
상팔담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철조망의 무게에 눌려 아쉬움을 지닌 채 이곳을 떠나곤 했습니다.
 |
|
| ▲
남쪽 출입국 관리소. 공항에서의 출입국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출입국 관리소에서 바라본 통일전망대 |
|
| ⓒ2005 백유선 |
|
바라보기만 했던 그곳 금강산을 이제 육지를 통해 가게 되었습니다. 민통선, 북방 한계선, 휴전선, 북측의 남방 한계선을 차례로 지날 생각을
하니 가슴 속에는 기대감과 함께 무엇인지 모를 긴장감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긴장 속에 드디어 차는 휴전선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차 안에서 현대 측 안내원이 휴전선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휴전선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것이었죠.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휴전선은 철조망으로 되어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차를 타고 통과하면서 본 휴전선 표시는 녹슨 철판 표지판,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휴전선은 단지 그것을 알리는 작은 푯말 하나에
불과할 뿐, 그 동안 TV를 통해서 본 철책선은 북방 한계선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휴전선을 기점으로 남북 각각 2km지점에
남한의 북방 한계선과 북한의 남방 한계선이 이중 철조망으로 각각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는 말 그대로 비무장 지대인 것이죠. 다시
말하면, 휴전선이 철조망이 아니라 남측과 북측의 경계선이 철조망이었던 것입니다. 군에도 다녀왔건만 이제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서, 전에는 통일 전망대에서만 볼 수 있었던 낙타등 모양의 구선봉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과 금강산이
말 그대로 개골산 즉 바위산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북측 한계선을 지나 북한 군인의 검문이 있었습니다. 인원수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딱딱한 모습이어서인지 우리 학생들의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이곳을 지나니 이제는 북한의 영역입니다. 멀리 북한의
마을이 보이고 걷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울타리가 처진 찻길 주변에는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부동자세로 선 북한 군인이 버스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을 감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군사시설이 있는 지역이니 촬영을
철저히 통제한다고 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이나 군사지역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으나, 사실 군사 시설이 쉽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보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들의 딱딱한 모습에서
이곳이 북한 땅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계속됩니다)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으면서 북한은 어떤 이유로 금강산 관광을 허용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남과 북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고 특히 휴전선에서 금강산까지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관광을 허용하여 자신들의 일부를 드러내야
했던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금강산에 오기 전에 찾아 보았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생각이 났습니다.
명나라에 대해
사대를 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명 사신의 금강산 유람 요구에는 무조건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사신의 경우는 많이 달랐습니다. 일본 사신의
금강산 유람 요청에 "적국의 사신에게 우리 국토를 보여서는 안된다"며 한달 이상 논의가 계속되고, 임금이 자신의 결정을 여러 번 번복했다고
합니다. <실록>을 통해 조선 정부의 논의 과정을 정리해 살펴 보겠습니다.
왜인에게 우리 나라 땅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
성종 때 대마도주가 "앙지 화상을 특사를 삼아 향 한포를 가지고서 보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 아뢰어 금강산
유점사에 이르러서 신을 대신하여 향을 올리게 하여 주소서"라며, 금강산의 유점사에서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해옵니다.
 |
|
| ▲
‘전자도서관’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앙지’로 검색한 화면. <성종실록>에는 앙지의 금강산 구경과 관련한 기사가 모두
12건이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성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금강산 구경을 허락하였으나 신하들 사이에서
복잡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침략의 가능성이 있는 왜인에게 우리 나라 땅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일반적인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앙지는 이미 나이가 든 승려이고 금강산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보여주기는 하되, 원주, 충주 쪽으로 돌아가도록 하면 모두 험한
길이므로 도리어 우리 나라를 범할 수 없다고 여길 것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결국 성종은 이 문제를 원로들과 다시 의논하도록
합니다. 한명회 등이 금강산 유람을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성종은 다시 허락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반대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이때 신하들의 제기한 반대 이유는 크게 세가지였습니다. 경비가 많이 든다는 것과 눈으로 인해 재난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 특히 모든
섬의 왜인들이 앙지를 본받아 잇달아 구경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이를 또 다시 의논하도록
합니다. 벌써 여러 차례 임금의 결정이 번복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골치 아픈 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름 아니라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이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논의 결과 한번 허락했으니 번복하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의견에서부터 눈이 쌓여 길이 막혀 어렵다고 달래
보자는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반대하는 신하들은 "앙지가 가는 도중에 만약 도둑을 만나 해를 당하거나 혹시 눈에 깔려
죽는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임금은 "앙지가 비록 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어찌 잘못이 우리에게 있겠는가? 만약 앙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분을 품을 것이니, 유감을 품고 변란을 선동하고 일을 낼 것 같다"며 금강산에 보내자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지금 길이 멀고 통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다시 달래서 중지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산과 계곡의
도로는 경솔하게 적국의 사람들에게 알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합니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소란을 피울까 걱정하는 임금에게 그래도 국토를
보여주는 것은 안 된다는 내용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경하다가 눈 속에서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결국은 눈이 깊이 쌓였고 길이 험하다는 이야기를 앙지에게 전하고, 그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기로 합니다. 그런 뜻을
임금의 글로 전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네가 도주(대마도주)의 청을 매우
간절하게 말하였기 때문에 금강산을 구경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강원도의 지역은 산길이 매우 험하며 겨울에는 눈이 산봉우리와 언덕같이 쌓여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때로 실종되기도 하며 갑자기 길에서 죽기도 하므로 네가 그곳으로 가는 데 대해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길에서 불행하게
이와 같은 환란이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
|
| ▲
실제로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금강산은 구경이 쉽지 않습니다. 눈이 온 지 10여일이 지났으나 여전히 녹지 않고 있는 구룡연 가는 길의 눈.
관광객을 위해 눈을 치우고 길을 뚫어 놓았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글을 전하고 앙지의 의사를 물으니, "칠십이 된 노승이 어찌 감히 대국에
다시 오겠습니까? 금강산을 구경하다가 눈 속에서 죽더라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이 온 왜인들도 "비록 우리 스승과 한 구덩이에
같이 죽더라도 가서 구경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앙지의 뜻이 이러하니 결국은 금강산 구경을 허락하게 됩니다. 조선
조정에서의 논의가 무려 한달 이상을 끈 이후에야 겨우 허락하게 된 것이죠.
비록 늙은 승려이기는 하나 적국의 사신에게 국토를
보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과 만약 무슨 변고를 당했을 때의 책임 문제 등이 이토록 긴 논의를 불러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직접 임금이
글을 내려 위험을 미리 경고함으로써 추후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안심이 안
되었는지, 유점사는 동해가 내려다보이므로 보일 수 없으니 표훈사와 정양사 등의 절만 보도록 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성종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이 바뀐 성종은 앙지가 성심으로 구경하기를 청하면 유점사를 보여주라고 합니다.
임금의 생각이
이처럼 우유부단하게 보일 정도로 여러 번 바뀔 정도였다면 이 문제가 큰 문제였음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종 때에도 왜인들에게는 금강산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 일본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을 위한 발걸음, 금강산 관광
 |
|
| ▲
온정리의 정몽헌 추모비 |
|
| ⓒ2005 백유선 |
| 조선 전기 일본의 침략적 위협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도 이토록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적으로부터 국토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북한 정부로서는 어쩌면 매우 위험한
모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남북은 군사적인 대치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북한의 금강산 관광 허용은 대단한
결정이었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금강산에서의 여러 가지 여행상의 제약도 나름대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고배율의
카메라를 금한다거나 이동 중에 촬영을 못하게 하는 등의 그들의 조치를 비난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
 |
|
| ▲
도올 김용옥이 글을 쓴 정몽헌 추모비에는 ‘세계사의 모든 갈등을 불사르며 남북화해의 새로운 마당을 열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그렇다면 엄연히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고, 특히 폐쇄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이 왜 이를 허용했을까요? 아무리 촬영을
금지한다고는 하나 육안을 통해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위험을 감수하고, 게다가 자본주의 물결이 금강산에 젖어들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추측컨대 남측의 금강산 관광 욕구와 외화벌이에 한푼이라도 아쉬운 북측의 이해관계, 게다가 통일을 위한 발걸음이라는 대의명분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느 정치인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과감하게 추진한 고 정주영, 정몽헌 부자의 노력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를 허용한 북한의 태도는 대범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말이죠. 실제로 북측의 군인들과는 달리 여행 중에 만난 북한 사람들은 꽤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함을 보였습니다. 오히려 경직된
것은 제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됩니다)
휴전선을
넘어 차창 밖으로 눈을 고정한 채 북한 땅을 살펴보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장전항 근처에 있는 북측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을
통과하면 이제 정식으로 북한에 입국하게 됩니다.
남측이나 북측이나 출입국 업무는 인천공항에서와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여권과
비자를 신분증과 금강산 관광증으로 대신한다는 것이 다를 뿐 다른 나라에 출입국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복잡한 출입국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한
민족 두 나라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아쉬움입니다.
금강산 관광객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
 |
|
| ▲
금강산 안내도 |
|
| ⓒ2005 백유선 |
| 출입국사무소 앞에는 ‘금강산 관광객을 동포애의 심정으로 환영한다’는 큰
표지판이 서 있었습니다. 출입국 관리소가 있는 장전항 근처는 북한의 군사시설이 있는 곳이어서 일체의 사진 촬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가슴 깊게 다가온 이 환영 문구를 촬영하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용기를 내어 북한의 세관 직원에게 촬영을
부탁했습니다. 다소 계급이 낮아 보이는 이 사람은 갑작스런 남측 사람의 요구에 당황해 하며 대꾸를 하지 않더군요. 이번에는 책임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부탁해 보았습니다.
“죄송하지만, 밖에 저 환영 문구가 정말 마음에 드는데 사진 한장 찍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거요. 온정리에 가면 많이 있을 걸요. 거기서 찍으세요.”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일단 포기했으나 뒤에 보니
온정리에는 그런 글귀가 없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현대에서 세운 환영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천하의 명산 금강산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커다란 광고판에 ‘현대아산’ 표시와 함께 쓰여 있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이 세운 것은 존대어가 아닌
반말 투의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북한의 대부분의 구호가 그렇기는 하지만 ‘환영한다’로 마치는 반말 투의 환영인사는 왠지 생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표현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갈 기회가 있어서 언어 표현에 소양이 있는
북한 사람을 만나면 꼭 알아보고 싶습니다. 50여년이 넘는 분단 세월이 우리의 언어 표현에 많은 변화를 주었지만 이런 식의 구호도 큰 차이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구호로라도 큰 환영을 받으며 이제 정식으로 북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장전항 뒤편의
마치 천기의 불상이 앉아 있는 모양의 천불봉, 스님의 바리를 엎어 놓은 듯한 바리봉 등 금강산의 일부를 바라보며 숙소가 있는 온정리에
도착했습니다.
금강산 관광의 ‘본부’ 온정리
온정리는 예로부터 글자 그대로 온천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조선
세조 때 이곳의 온천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때에도 온천으로 이름이 났으며 세조도 이곳에 다녀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
|
| ▲
김정일 국방위원장 금강산 방문 기념비. 친필 사인과 글씨를 보면 상당히 우경화되어(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온정각. 금강산 관광의 ‘본부’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식당, 기념품 가게 등이 있습니다. 온정각 뒤로는 하천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온정리
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뒤쪽 산은 매가 앉아 두리번거리는 모양이라 하여 매바위산이라고 합니다. |
|
| ⓒ2005 백유선 |
| 이곳에는 금강산 관광의 본부격인 온정각을 중심으로, 장전항에 떠있는
해금강 호텔을 비롯해 금강산 호텔, 그리고 금강산 온천 근처의 온천 빌리지 등의 숙소가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온정각에서 각각의
숙소로는 셔틀버스가 운영되고 있어서 버스를 타면 쉽게 오갈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기 전에는 북한의
관광객들이 묵었을 온정각 앞의 ‘김정숙 휴양소’는 현재 수리 중이었는데, 앞으로 보수하면 이곳 역시 남한 관광객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외 온정리에는 여러 곳에서 숙소 및 식당을 세우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
| ▲
온정각의 밤 모습 |
|
| ⓒ2005 백유선 |
|
 |
|
| ▲
금강산 문화회관.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온정각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이곳 금강산 관광 특구의 중심에 있는 온정각에는 식당을 비롯해 면세점과
기념품 가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로 식사를 했던 온정각의 식당은 뷔페식으로 운영되었으며, 여행상품에 따라 식비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상품도 있어서 식권을 구입하면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식비가 포함되어 있는 상품의 경우에는 어느 곳에서나
관광증을 보여주면 출입하여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온정각의 기념품 가게와 면세점은 여느 관광지의 상품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 남쪽에서 제작된 것에 금강산 표시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제가 구입한 기념 볼펜도 밖에는 금강산 관광 기념이라고 쓰여 있었으나 볼펜심에는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금강산에 대한 책자를 구입하고 싶었으나 북한에서 제작한 것은 <나뭇꾼과 선녀>에 관한 그림책 한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금강산 사진집 같은 것도 모두 남쪽의 사진작가가 촬영한 것으로 이곳에서만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현대 측 직원과 현대와 계약을 맺은 인력회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연변의 조선족들이 많아 처음에는 이들이 북한을 통해 고용된 줄로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아 보니 이들은 모두 남한을 통해 고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래도 이들에게서는 북한의 분위기가
풍겨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양에서 온 포장마차 ‘온정봉사소’
온정각에서 식사를 마친
후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은 곳은 온정각 바로 앞의 포장마차인 ‘온정봉사소’였습니다. 북한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간이
천막 건물을 지어 놓고 마치 우리의 포장마차와 다를 것이 없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
|
| ▲
온정봉사소. 온정각 앞의 주차장 한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소주와 맥주, 들쭉술을 비롯한 주류와 포장마차식 안주인 구이류, 간단한
탕류, 두부 등 여러 가지 안주가 있었으나 우리와는 요리 방법이 달라서인지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는
우리의 것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아서 가장 손이 많이 갔습니다.
온정봉사소는 평양에서 온 사람들이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주방장과 관리인 및 세명의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평양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주방장은 현재 이곳에 신축중인 북한 식당인 옥류관이 완성되면 그곳의
주방장을 할 거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남남북녀'라고 하더니 이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아가씨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측에서는 보통 아가씨라고 하는 데, 여기서는 어떻게
불러야 하죠?” “봉사원 동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다소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 졌고 이후 모두들 그렇게 불렀습니다.
금강산에 와서 처음 만난 북한 여성이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눠보려 했습니다.
“평양에 사셨으면 학교도 거기도 다녔겠네요. 어느
학교 졸업했어요?” “평양 상업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물어본 두 여성 봉사원은 모두 평양 상업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미모의 대졸 여성과 포장마차, 그것도 작은 포장마차에 세명씩이나 일을 한다는 것이 왠지 잘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다
일하는 중이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온정봉사소는 저녁 9시면 문을 닫는다고 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에서 외화 벌이가 경제 살리기의 큰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런 정도의 소규모 포장마차로 어느 정도 외화를 벌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비슷한 소규모 노점은 금강산 중산 중간에도 있었습니다. 북한 여성 2, 3명이 좌판을 벌이고 간단한 북한
과자류를 팔고 있었습니다. 이 역시 외화 벌이를 위한 것이겠지만 북한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반영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
온정각 옆의 김정숙 휴양소. ‘금강산을 근로자들의 문화휴양지로 꾸리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북한의 휴양시설이었으나, 수리 후 남한 관광객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합니다. 앞의 천막은 북한이 운영하는 포장마차 ‘온정봉사소’. 오른쪽 아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문 기념비.
|
|
| ⓒ2005 백유선 |
|
 |
|
| ▲
김정숙 휴양소 입구의 구호. 북한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구호 중의 하나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온정각을 비롯한 이곳 ‘관광촌’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화폐는 달러입니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우리 돈을 달러로 환산한 카드를 구입하여
사용이 가능하였고, 비자카드 등 외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도 사용이 가능하였습니다. 때로는 원화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정봉사소에서는 오로지 달러와 환산 카드만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관광객은 모두 남한 사람들뿐인데 왜 원화 사용이 제한이
되는지 불편했습니다. 특별히 구입할 물건이 없었고 기념품은 비자카드로 결제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수중에 달러가 없으니 음료수를 마시거나
할 때에는 다소 불편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직접 환전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현대 측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대부분인데 모두
원화로 사용하고, 북측 시설의 경우에는 나중에 현대 측에서 달러로 환전해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계속됩니다)
봉우리 하나하나, 골짜기 하나하나가 그림 같은 금강산의 풍경에 심취해 사진 찍으랴, 구경하랴 쉴 틈이 없이
바빴습니다. 등산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요. 구룡연 코스는 만만치 않은 산길입니다. 하지만 두 눈이 즐거우니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앙지대와 삼록수를 지나 주차장에서 약 2km지점에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금강문 앞입니다.
이곳에는 화장실이 있어서 유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달러만 사용이 가능하며 소변기는 1달러, 좌변기는 4달러를 내야 합니다.
화장실은 남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이 화장실로 남한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
|
| ▲
금강문앞 쉼터. 앞쪽은 표식비, 바위 뒤로 노란색 유료 화장실이 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북한 화장실 관리인에게 이곳의 오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물어 보았더니,
자기들이 매일 아래쪽으로 짊어지고 내려가서 처리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슨 화장실 사용료가 그렇게 비싼가 하고
생각했으나, 사정을 듣고 나니 그 정도는 받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강문을 지나야 금강산 맛이
납니다"
이곳에는 김일성 주석이 “이 금강문을 지나야 금강산 맛이 납니다”라고 한 것을 기념하는 표식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제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금강산의 경치를 맛볼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표식비와 바위에 새긴 글씨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
김일성 주석의 현지지도 표식비 |
|
| ⓒ2005 백유선 |
|
 |
|
| ▲
금강문. 거대한 바위가 머리를 기대어 문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문이란 본래는 출입을 제한하거나 허용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면서도 안과
밖을 구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밖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집니다. 사찰에서도 일주문,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을 넘어서면 부처의 세계라 할 수 있는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금강문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 즉
금강산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금강의 세계’로 들어가는, 금강산의 관문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이곳을 통과해야
비로소 금강산에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문은 길을 가로막은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서로 기대어 뚫려있는 문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동굴모양의 길은 중간에서 한번 꺾여서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길을 막고 있었다고
하는데, 홍수로 바닥의 흙이 쓸려 내려가면서 지금처럼 바위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
|
| ▲
금강문 들어가는 곳. 이렇게 들어가서 |
|
| ⓒ2005 백유선 |
|
 |
|
| ▲
금강문 나오는 곳. 이렇게 나옵니다. |
|
| ⓒ2005 백유선 |
| 금강문 앞 바위에는 붉은 한글로 금강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옛 글씨는
없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바로 곁에 한자로 희미하게 금강문(金剛門)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옥룡관(玉龍關)이란 한자 글씨도 눈에
띄었습니다. 옥류동과 구룡연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
|
| ▲
금강문 글씨. 한글 좌우로 희미하게 ‘금강문’, ‘옥룡관’이 한자로 쓰여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에는 이처럼 바위사이를 문처럼 지나가는 곳이 많은 데 대체로
금강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곳 금강문이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사람의 눈은 누구나 비슷한지 이곳 금강문 글씨 곁은 많은
사람들의 사진 촬영 장소가 되고 있었습니다.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니 금강산임을 확실하게 나타내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금강문 글씨가 쓰여 있는 맞은편 바위에는 작은 글씨로 칠선암(七仙巖)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금강문을 이루는 바위의
하나인데 왜 칠선암일까를 꽤 고민하며 생각해 보았으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래 일곱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글씨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언젠가 이곳을 방문한 선비들이 자신들을 일곱 명의 신선에 비유하여 칠선암이라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답을 모르니 이런 경우엔 틀리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상상하는 즐거움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
|
| ▲
금강문 한쪽 바위에는 ‘칠선암’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그들이 신선이기를 자처했다면 이제 저도 신선입니다. 아니 신선이 되기로
했습니다. 금강산에 온 사람 치고 신선이 아닐 사람이 있을까요? 아, 여자 신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여성들은 신선이 될 수가
없겠군요. 그럼 선녀?
‘옥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옥류동
금강문을 지나 신선이 되었으니 세상
복잡한 일은 모두 잊고 깨끗한 마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행을 계속합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새로이 펼쳐지는 금강산의 경치를 앞뒤로 하며 한참을
가다보면, 금강산 최고의 경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옥류동에 이르게 됩니다.
옥류동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옥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골짜기’란 뜻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이곳의 모습이 기대가 될 정도입니다.
커다란 바위들이 흰 눈 속에 여기
저기 널브러져 있는 절벽아래 비탈길을 지나면 무대바위가 나타납니다.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이 바위는 옥류동의 경치를 구경하도록 하기
위해 마치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계곡의 일부를 덮고 있습니다. 옥류동의 경치를 구경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많은 시인들, 화가들이 거쳐 갔을 이 바위에 서면 보이는 곳은 선계요, 보는 이는 바로 신선입니다. 인간이 만들려고 해도 이렇게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봉우리며, 바위며, 계곡이며, 보이는 것 하나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아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절로 시구가
떠올라야 하는데.
이곳이 옥류동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옥류담과 옥류폭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만 5~6m가 된다는 옥류담과 그
위쪽에서 완만한 경사로 구슬처럼 흘러 내렸을 옥류폭포는 모두 얼어 있는 지라 그 느낌이 덜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다소 조악해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손길인 옥류교는 멀리서 계곡의 경치에 한 가지를 보태고 있습니다.
 |
|
| ▲
옥류동. 가운데가 무대바위, 그 뒤로 옥류담과 옥류폭포가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옥류동. 옥류교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 본 모습입니다. 옥류폭포와 옥류담은 모두 얼어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표현력이 부족하여 이 절경을 제대로 그리지 못함을 한탄합니다. 대신
최남선이 <금강예찬>에서 옥류동에 대해 묘사한 일부를 옮겨봅니다. 뒤에 친일파로 오점을 남기긴 했으나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탁월합니다.
“기묘, 웅장, 밝음, 화려, 그윽함, 현묘함, 원만함, 빼어남, 소리, 색채, 정신,
기운 등 이밖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체의 미적 요소, 미적 조건, 미적 요구를 모조리 제출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의 완전한 조화
상태를 상상하여 보십시오. 그런데 그것이 물적으로 또 경치상으로 성립된다고 하면, 그것이 어찌 되는지를 알려하거든, 나는 옥류동을 보시라
하겠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요소들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경치로 나타난 것이 옥류동이라는 그의 묘사는
실로 옥류동의 경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줍니다. 게다가 그는 이 정도로는 부족했는지 자신의 묘사는 옥류동의 만 가지 중에서 한 가지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극찬할 수 있는 표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옥류동의 경치에 빠져 있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해진 시간과 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 옥류교를 지나 조금 오르다보면 계곡아래에 연주담이 나타납니다.
모르긴 해도 옥빛으로 빛났을 이 두개의 연못은 표지판을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하는 말이지만 얼어있기 때문입니다.
 |
|
| ▲
연주담. 얼어있어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선녀들이 놀다가 흘리고 갔다는 두개의 구슬이 지금은 못이 되어, 초록빛 물이 구슬처럼 흘러 고이고 또 넘치는 곳입니다. 마치 두개의 초록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연주담이라고 합니다. 누가 처음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그 발상이 대단합니다. 신선이 아니면 붙이기 어려운
이름입니다.
눈과 얼음에 덮여 온통 흰빛인 계곡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옥류동과 연주담 등 계곡의 경치는
다른 계절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의 경치를 말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폭포일 것입니다. 구태여 금강산이 아니더라도
계곡의 물이 모여 낙차를 그리며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하나입니다.
물과 바위, 계곡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폭포는 늘 우리 옛 그림의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옛 그림 중에는 도저히 물이 없을 것 같은 거의 산 정상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그림들을 보면 '저런 폭포는 없어, 그림일 뿐이지'하고 의문을 품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문은
금강산의 폭포를 보고서야 풀리게 되었습니다. 금강산 계곡에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비봉폭포와 구룡폭포는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물길이 떨어져 춤을 추며 날아가는 봉황을 만들고
연주담을 지나 걷다보면
거대한 절벽 사이로 하얀 물줄기가 박제가 된 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비봉폭포입니다.
폭포 맞은편 길가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폭포의 모습은 다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절경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산 정상에서 아니 하늘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비봉폭포는 제게 다가왔습니다. 무려 150m가 넘는다는 이 폭포는 물줄기가 바위 모양에 따라 몇 차례 꺾이기를 되풀이하며 계곡으로 물을
토해내는 모습입니다.
 |
|
| ▲
비봉폭포. 높이가 무려 150m가 넘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비봉폭포와 전망대. 전망대에서는 북한 안내원의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치에 취하면 해설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람에 날리어 물안개를 피울 때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하여 비봉(飛鳳)폭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아래 쪽 계곡의 봉황담으로 들어가기까지 폭포수는 떨어지는 물줄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연의 신비를 모두 보여줄 것 같습니다.
이미 사진으로 본 다른 계절의 비봉폭포는 수량이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름처럼 바람에 날리는 물줄기가 신비감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겨울의 비봉폭포는 물줄기가 차곡차곡 얼어붙어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고 있습니다. 봉황이 나는 것 같은 신비감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보다는 웅장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겨울 비봉폭포입니다.
 |
|
| ▲
비봉폭포.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아마 겨울이기에 그 모습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폭포일
것입니다. 옥류동이나 연주담은 얼어 있어서 자신의 모습을 한껏 드러내지 못했다면, 오히려 얼어서 더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이 비봉폭포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봉폭포의 물줄기가 떨어지는 계곡의 봉황담 바로 위쪽에는 무봉폭포라고 이름 지은 또 하나의 폭포가 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계곡의 폭포입니다.
비봉폭포의 뛰어남 때문에 그리 눈길을 받지 못하는 폭포지만, 이곳 역시 폭포수가 바위에 부딪혀 거품을
내는 모습이 봉황이 춤을 추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봉(舞鳳)폭포라 한다고 합니다. 두꺼운 얼음만으로도 그 모습이 대략 짐작이
됩니다.
 |
|
| ▲
무봉폭포. 봉황이 춤을 추는 모습을 연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이 두 폭포에서 비록 봉황이 날아오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모습이 충분히 상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동안 임금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인 봉황의 모습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드디어 이곳에서 봉황을 그려보았습니다.
과연 금강산은 신선이 된 관광객을 봉황이 맞이하는 신비스런 산임이 틀림
없습니다.
아홉 마리 용이 만들어낸 구룡폭포
봉황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구룡연과 구룡폭포를 향했습니다.
구룡폭포로 가는 길은 금강산에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길가에는 약 1m가
넘는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현대 측 안내원에 의하면 눈이 처음 왔을 때는 계곡의 난간 손잡이까지 차올라 그 위를 걸어갔다고
합니다.
계곡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구룡폭포를 감상하기 위해 지어 놓은 관폭정입니다. 말 그대로 폭포를
감상하기 위한 정자란 이름입니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이 정자는 일제시기에 없어졌다가 1961년 북한에서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명승이라 이를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놓여 있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시를 지어 가며 감상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관폭정은 여러 정자들 중에서도 감상을 위한 용도로 보자면 가장 잘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구룡폭포의 전모를 감상하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인 이 정자에 서면,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과 같은 느낌으로 폭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
|
| ▲
관폭정. 구룡폭포를 감상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관폭정과 구룡폭포 |
|
| ⓒ2005 백유선 |
| 폭포수가 떨어져 소용돌이 치는 아래쪽 구룡연이란 못은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에서 붙은 이름이고 그래서 폭포도 구룡폭포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겨울철에는 그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구룡폭포는
사방이 막힌 골짜기의 마지막 지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높이만 74m나 되는 데다 수량이 풍부하여 그 위용이 짐작이 가고 남습니다. 얼어 있는
모습만으로도 떨어지는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굉음이 골짜기를 뒤덮었을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어떤 이는 '귀를 먹게 하는 소리', '사람을 위협하는
소리'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겨울 구룡폭포 영화관에는 '돌비 스테레오 사운드'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침묵하는 폭포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오히려 고요하게 겨울잠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편안하게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그리고 그 폭포에는 기약할 수 있는 내일이 있습니다. 눈이 녹는 봄철이 되면 다시 그 위용을 뽐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은 침묵하나 기약하는 내일이 있기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폭포'라고 스스로 겨울 구룡폭포의 멋을 정리해 봅니다.
앞의
비봉폭포는 수량이 많지 않아 오히려 계곡의 물소리에 폭포소리가 묻혀 버려, 시각으로만 흩날리는 물줄기를 감상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구룡폭포는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마치 달리는 기관차 엔진 굉음 소리처럼 들릴 것 같습니다. 물줄기 소리가
계곡을 덮는 장면을, 오감을 동원하여 감상하면 그 진면목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름처럼 마치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눈과 귀로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기약해 봅니다.
 |
|
| ▲
구룡폭포. 74m나 되는 큰 폭포지만 사진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폭포 오른쪽으로 '미륵불' 글씨가 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전에 보았던 백두산의 장백폭포가 엄청난 규모와 천지의 물이 떨어진다는
상징성으로 이름 높다면, 구룡폭포는 거기에 바위산의 아름다운 경치까지 뒷받침하고 있어서 더 경이롭게 생각되었습니다.
구룡폭포에
심취해 하마터면 놓칠 뻔 했던 관폭정(觀瀑亭)의 현판글씨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글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저로서도 폭포를 감상하기 위한
정자의 글씨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폭(瀑)자를 폭포란 느낌이 들도록 흘려 쓴 지혜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
|
| ▲
관폭정 현판. 가운데 ‘폭’자를 폭포수처럼 흘려 쓴 지혜가 돋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폭포 곁에는 '미륵불(彌勒佛)'이란 거대한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사찰의 현판을 쓴 근대의 명필 혜강 김규진이 금강산 주변 불교 신자들의 부탁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글씨의 크기만
무려 19m나 된다는 이 글씨는 폭포와 어우러져 폭포의 비경을 빛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폭포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어 없으면 허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
‘미륵불’ 글씨. 혜강 김규진의 글씨로 무려 19m나 됩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서산 개심사 현판. 김규진은 개심사, 해인사 등 우리나라 여러 사찰의 현판을 쓴 근대의 명필로, 우리나라에 사진 기술을 처음 도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
|
| ⓒ2005 백유선 |
|
다소 엉뚱하지만 왜 다른 내용도 아닌 '미륵불'이라고 썼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륵불은 미래의 부처로 기독교로 말하자면
메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의 해방을 기대하는 민중들의 마음을 새긴 것은 아닌가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비약일 것 같습니다.
예전 이곳을 찾았던 이광수는 금강산 기행기에서 이 글씨를 보고 큰 죄를 범했다고 꾸짖었다고 합니다만,
친일로 이름을 더럽힌 그가 다른 사람을 꾸짖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명승지에 새긴 옛 선현들의 글씨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이야깃거리를 남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계속됩니다)
구룡폭포를 구경하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상팔담입니다. 하지만 상팔담은 눈이 많이 쌓여 등산이 통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상팔담이 무대가 된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
|
| ▲
구룡폭포에서 내려오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올라가면 구룡대에 이르고, 구룡대에서 상팔담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 전설'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생각할 것입니다. 금강산의 많은 설화 가운데에서 가장 국민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첫날 차를 타고 오면서 학생들에게 금강산에 대해
말하면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나무꾼과 선녀'라고 하지 않고, '선녀와 나무꾼'이라며 선녀를 먼저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노래 제목 때문인지 아니면 '레이디 퍼스트'처럼 여성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표현법에서 세월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학생들에게 나무꾼의 정확한 표기법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나뭇군'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제넘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우리말 표기법에서 '사이시옷'의 활용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워드프로세서가 맞춤법의 오류를 잡아주는 기능이 있어서 고쳐주고 있다는 것이겠죠.
 |
|
| ▲
상팔담 가는 방향의 계곡 |
|
| ⓒ2005 백유선 |
| 우리가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숨겨 주었더니, 사슴은 은혜의 보답으로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는 곳을 일러
주며,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고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 보여 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사슴이 일러 준 대로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었더니, 목욕이 끝난 다른 선녀들은 모두 하늘로 날아 돌아갔으나 날개옷을 잃은 한 선녀만은 가지 못하게 되어, 나무꾼은 그 선녀를 데려다
아내로 삼게 됩니다.
아이를 둘까지 낳고 살던 어느 날, 나무꾼이 선녀에게 날개옷을 보이자 선녀는 입어 보는 체하다가 그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어느 날 사슴이 다시 나타나 나무꾼에게 하늘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릴 터이니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일러 줍니다.
사슴이 일러준 대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에 올라간 나무꾼은 아내와 자식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대체로 이 부분까지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예전에 초등학교에서 이렇게 배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피엔딩'이네요.
그러나 이 설화는 마지막 부분이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두레박줄을 선녀 아내가 끊어 버렸다고도 하고, 하늘나라에서 여러 시험을 거쳐 잘 살았다고도 하며, 또는
1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견우와 직녀가 되었다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
| ▲
금강산온천 앞에 있는 나무꾼과 선녀를 그린 사진 촬영용 기념물. 선녀가 나이 지긋한 아저씨처럼 목에 수건을 감고 목욕하는 모습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결말이 다른 두 가지 '나무꾼과
선녀'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합니다. 모두 위의 내용에서 이야기가 마무리 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하늘나라에서 나무꾼은 한동안 행복하게 살았으나 지상의 어머니가 그리워져서 아내의
주선으로 용마를 타고 내려오는데, 이 때 아내는 남편에게 절대로 용마에서 내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지상의 어머니가 아들이 좋아하는
호박죽(또는 팥죽)을 쑤어 먹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죽을 말 등에 흘리는 바람에 용마는 놀라서 나무꾼을 땅에 떨어뜨린 채 그대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지상에 떨어져 홀로 남은 나무꾼은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슬퍼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수탉이 되어 지금도 새벽이면
지붕 위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며 운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좀 슬픈 결론입니다. 매일 새벽 지붕에 올라 하늘을 보며
우는 수탉이 되었으니까요.
또 하나, 주로 금강산에 전해지는 설화의 결말은 이 이야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하는 일 없이 행복하게 살던 나무꾼은 시간 가는 줄 몰랐으나, 부지런히 일하며 살던 때가 생각나 이내
싫증이 납니다.
하늘나라가 아름답다고는 하나 구름이나 별의 변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처럼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신록이
우거지고, 단풍이 들고, 백설이 덮이는 아름다움은 없었던 것이죠. 더구나 산과 계곡, 구름과 안개, 바람이 일으키는 조화로 인한 아름다움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살던 금강산을 그리워하게 되죠. 아내 역시 몇 년 동안 살던 금강산이 그리워집니다. 결국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온 가족이 금강산으로 내려옵니다. 그 후 그들은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행복하게 살았다'로 결말지어지네요. 아무래도 비극적인 결말보다는 듣고 나면 훨씬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
|
| ▲
겨울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은 하늘나라보다도
아름답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또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느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답변은 "여자는 로또복권이다"라고 하는 해석이었습니다. 무지렁이 나무꾼이 아름다운 선녀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이는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결말에 수탉이 되어 울게 되는 것 역시 같은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해서 모두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듯한 비유가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기묘한 결론을 내는 것을 보고 한동안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설화에서 사슴이 나무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흥부와 놀부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비가 흥부에게 보답한 것은 박씨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금은보화를 주었지요. 직접 물질로 보답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 사슴은 나무꾼에게 다름 아닌 '정보'를 줍니다. '선녀가
목욕하는 장소', '아내로 맞이하는 방법' 등 나무꾼에게는 모두 중요한 정보입니다. 나중에 '두레박'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이고요.
 |
|
| ▲
겨울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에 살면서도 나무꾼은 선녀의 목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런 정보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을 혼자 살았을 것입니다. 나무꾼은 그 정보를 얻었기에 인생 역전을 겪게 되는
것이죠.
요즈음 같은 정보화 시대에 어떤 분야에서든 정보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는 바로 정보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하는 설화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요즘 같으면 사슴은 개인정보 유출로 처벌을
받겠지요.
두 번째로는 약속의 중요성을 생각해 봅니다. 사슴이 아이 셋 낳을 때까지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건만 안일해진 나무꾼은
그걸 지키지 못했고, 결국 선녀가 떠나가게 되죠. 물론 약속이라기보다는 여느 설화에서나 보이는 금기 사항입니다.
단군신화에서도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을 견뎌야 한다'는 금기 사항이 있었죠. 이를 지킨 곰만이 사람이 되잖아요? 요즈음에는 금기라 할 만한
것이 따로 없으니 약속으로 해석해 봅니다. 물론 이런 설화적 교훈이 아니더라도 약속은 잘 지켜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선녀의
매몰찬 성격을 봅니다. 비록 하늘나라의 부모 형제가 그리웠다고는 하나, 남편을 버리고 떠나는 대목에서는 비정함을 느낍니다. 두 자식을 아버지와
떼어놓는다고 생각하면 그 비정함은 더합니다. 이 대목에서 처음에 로또복권으로 풀이했던 분은 한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여자를 믿지
마라'.
나무꾼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다시 내려오는 대목에서는 효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을 봅니다. 여기에서 설화 속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이 보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남자는 잠깐 내려와 어머니를 만나보려고 했던 점이죠. 설화 속 나무꾼은
가족을 버릴 만큼 매몰차지 못합니다.
 |
|
| ▲
겨울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그러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핵심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할 정도로, 또 하늘나라에서 살다가 다시 내려올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
금강산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야기가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짜임새도 있어 보이고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어떤 다른
비유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보다도 경치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으니, 금강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설화가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
|
| ▲
겨울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 |
북한에 왔으니 북한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미
온정봉사소의 봉사원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긴 했으나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을 붙잡고 오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요.
 |
 |
|
| ▲
중국 심양 북한 식당의 북한 여성. 이들은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직접 연주와 노래를 합니다. 길게 대화하기는 곤란하지만 질문에 잘 응해 줍니다.
|
|
| ⓒ2005 백유선 |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지난해 심양의 북한 식당에서 대화를 했던 북한 여성들에게서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았었거든요.
산행
도중 만난 북한 여성 안내원은 넘어질 뻔한 저에게 "조심하세요"라며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배려해 주는 마음이 고마워 인사를
건넸습니다.
"참 아름다우십니다." "금강산에 오셨으니 예뻐 보이는 겁니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 속에 있으니 그렇게
보이시는 거예요."
너무나 금강산에 어울리는 그녀의 답변에 다음 질문을 잇지 못했습니다. 곁에 있던 나이 지긋한 북한 사람은 이
짧은 대화가 재미있었는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야, 너 좋겠다. 한턱내야 되겠는 걸."
 |
|
| ▲
아름다운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편안한 느낌을 준 잘 생긴 북한
청년
구룡폭포를 감상하고 기념사진 촬영을 부탁하다 우연히 북한의 젊은 안내원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잘 생긴
외모에 올해 나이가 30세라는 이 안내원은 오랫동안 이곳에 근무해서인지 각계각층의 남한 사람들을 접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남한의 사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호기심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국사교사인 제게는 남과 북의 역사가 어떤 점이 다른지
질문을 하더군요. 남한에서도 북한의 역사책을 볼 수가 있고 북한의 역사 연구 동향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생각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로 서로의 다른 체제가 근현대사를 보는 방법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최근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의
서훈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남한에서도 아직은 사회주의 계열을 다루는 데 있어서 조심스러우며, 그 점은 북한도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했습니다. 북한에서 우익계열 독립운동가를 거의 다루지 않는 것과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그렇지 않다며 반박을
했습니다. 어떤 우익을 말하느냐며 자기도 김일성 주석의 항일 혁명 역사만을 배운 것은 아니며, 상해 임시정부라든가 김좌진, 김규식, 정인보 등
우익인사들을 거명했습니다. 특히 평양 근처의 애국열사릉에는 우익인사들의 무덤이 많다면서, 북한에서 서술하는 역사가 편협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남북한의 경제 사정 등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소재로 계속되었습니다. '미국 문제'라든가 '김일성
주석의 항일 투쟁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조리 있게 자신의 주장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가급적 남한 사람에게 체제의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북한 경제가 어렵지 않느냐는
저의 말에, 그는 "아시는 것처럼 미국의 경제 제재가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라며 "그러나 우리는 굽히지 않고 잘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답했습니다. "앞으로 10여 년이면 우리도 많이 발전할 것"이라며 희망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
| ▲
구룡폭포의 북한 안내원이 찍어준 기념사진. 구룡폭포와 ‘미륵불’ 글씨 사이에 인물을 배치하여 구도가 아주 좋아 마음에 드는 사진입니다. 이
안내원은 사진을 아주 잘 찍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나이가 서른 살이 되었는데 장가 가야 하지 않느냐는 저의 질문에,
자신도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며 겸연쩍어하던 모습은 순수한 한 총각이었을 뿐입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여자 집을 자연스럽게 방문하여 선을
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금강산에 예쁜 여성 동무들이 많은데 여기서 잘 해보시지 그래요?" "이곳의 여성 안내원들은
눈이 높습니다."
눈이 높으면 어떤 남자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군관이 가장 인기가 많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를 묻는 질문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사명을 다하는 모습"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자신의 군인 경력이 짧은 것이 아무래도 단점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로 보아 북한의 여성들은 '사상성'이 투철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점은 내려오면서 대화를 나눈 여성안내원에게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 도중에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졸업생이 다가와 인사를 하고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본 그는 "선생님 인기가 많으신가
보네요"하며 웃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졸업생이 저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잘 안다고 하면서 인사를 했거든요.
이처럼 농담도
할 줄 아는 그는 진지하게 대화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경직된 사회주의 국가의 청년', '아마 선발되었을 사상이 투철한
사람'의 모습을 느끼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만 보았던 저의 생각이 오히려 경직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역시 같은 민족으로 비록 다른 체제에 살지만 지극히 건강한 젊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일이 대화의 내용을 모두 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서 체제가 달라서 생긴 이질감보다는, 언제나 대화가 가능하고 토론이 어렵지 않은 한 민족, 같은 동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처음 휴전선을 넘어 오면서 보았던 북한 군인의 경직된 자세나 경계심은 그와의 한 시간이 넘는 대화를 통해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서로 이름을 주고받고 나중에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구룡폭포 앞에는 관광객
중에서 유일하게 저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꼴찌로 내려오게 되었고 제가 내려오자 그곳의 모든 분들도 철수를
하였습니다.
여전히 순박함을 간직한 북한 처녀
내려오는 도중에는 비봉폭포 안내원으로 배치되어 있다가
철수하는 북한 여성과 대화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주차장까지 대화를 계속했으니 이 여성과도 한 시간 이상 대화를 하게 된
셈입니다.
약간 통통하면서도 예쁜 얼굴로 북한에서는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고성읍에 집이 있다는 이 여성은 대학졸업 후
금강산에 근무한 지가 5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
|
| ▲
비봉폭포 전망대의 북한 안내 여성. 살색 옷에 털모자를 쓰고 사진 찍는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나이가 26세라는 이 여성에게 그럼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남성안내원에게서 북한에서는 보통 남자 30세, 여성 26세쯤이 결혼 적령기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의 남자친구는 군 제대 후 김책공대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명문 대학에 다니는
것을 보니 남자친구가 공부를 잘했네요"라고 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제 1년만 다니면 졸업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학교가 평양에 있으니
평양에서 직장을 잡게 되면 그곳에서 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녀는 꽤 자신감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의사, 어머니는 전업주부이고 자신은 무남독녀 외동딸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에서의 의사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었더니, 자신의 아버지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으로 이곳에서도 신망이 두텁다고 했습니다. 이야기 중에 아빠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지금도 아빠라고 해요?"했더니, "아니요,
지금은 아버지라고 합니다"라며 쑥스러워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그럼 결혼 후에는 부모님은 누가 모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직은 젊으셔서 괜찮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모셔야지요"라고 하더군요. 앞의 남성 안내원도 자신이 셋째 아들이지만 부모를 모시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한과는 달리 아직 북한에는 전통적인 효의 관념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이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국사교사라고 했더니,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며 자신도
관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평양에 갔을 때 단군릉을 보았다며 국조 단군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는 자신의 역사관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남한에서는 단군릉을 보는 견해가 북한과는 다르다고 했더니, "학자들 간에는 견해가 다를 수도 있겠지요"라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또 아마도 학교 시절에 많이 배웠을 '김일성 주석의 항일 혁명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여성은 남한 사람들에게 굳이 자신의 생각을 먼저 내세우려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남한에서 역사 과목은 아무래도 입시제도
때문에 중요 과목이 아니라는 저의 설명에는, 역사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꽤 아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라며
우회적으로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강조했습니다.
 |
|
| ▲
구룡연코스 내려오는 길 |
|
| ⓒ2005 백유선 |
| 원산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그녀는 학창시절에 물리 과목은 싫어하고
음악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느냐는 저의 질문에 풍금은 잘 연주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원산으로까지
대학진학을 했으니 공부를 잘했겠습니다"라는 저의 말에는 미소로 답을 하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올해 8월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신문 보도의 내용을 전해 주었더니 꽤 좋아하였습니다. 그녀는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남과
북이 자주 만나 대화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며, 그러면 "통일의 길도 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의 청년도 그랬지만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꽤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사회주의
'사상학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앞서 남성안내원이 북한
여성들은 군관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습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저와 의견을 달리하는 유일한 내용이 바로 사상학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저의 반박에 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매우 다정다감해 보이는 이 여성은 제가 눈길에 미끄러지려고 하면 얼른
손으로 팔을 잡고 조심하라며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신발 끈이 풀어져 다시 묶으려 하면 기다려 주며 대화를 나눈 상대를 배려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마음으로나마 결혼 후 행복해지기를 바랐습니다.
주차장에 이르기까지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서, 그녀
역시 언제나 어렵지 않게 대화할 수 있는 우리 동포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
|
| ▲
겨울 금강산의 소나무. 우리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는 소나무는 남북 어디에서나 다르지 않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대화를 나눈 두 남녀를 통해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멀지 않았다고 할 만큼 우리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화의 논조나 방향은 다소 다른 점이 있었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대화를 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북한 총각, 북한 처녀와의 대화는
이번 금강산 여행 중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의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아 이렇게 '금강산 기행기'의 일부에 북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룡연 코스를 다녀오면서 불교관련 유적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마애불조차 이 코스에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 불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오직 하나 구룡폭포 곁에 새겨진 '미륵불' 글씨만이 유일한 불교의 흔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1920년에 새겨진
것이니 옛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그런 만큼 이제 구룡연 코스의 마지막 일정인 신계사는 옛 불교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기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
| ▲
금강산 신계사. 터만 남아 있던 곳에 남한의 지원으로 새로이 대웅전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때 세워졌을까?
조계종에서
배포한 <북한사찰기초자료>에 의하면 신계사는 법흥왕 6년(519)에 보운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유점사본말사지>등 옛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계사가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은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 법흥왕 당시에는 이곳 금강산은 고구려의
영역이었습니다. 이곳이 신라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북진하여 함경도의 일부까지를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의
일입니다.
그나마 7세기가 되면 다시 고구려에 빼앗겼습니다. 이를 입증하듯 이곳 금광산 관광의 본부인 온정리에는 고구려의 옛 성이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법흥왕 6년에는 신라에서는 아직 불교가 공인되지도 않은 시기입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한 법흥왕 14년(527)의 일입니다. 물론 공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신라에 불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의 예에 비추어 보면 신라 법흥왕 때 신계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
|
| ▲
신계사터 안내문. 519년 처음 세운 금강산 사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우리나라 여러 사찰을 세운 사람들을 살펴보면, 의상과 원효, 도선 등
유명한 승려들이 많습니다. 특히 풍수지리상 명당에 선 절은 도선에게서 유래를 찾는 곳이 많습니다. 도선이 풍수지리의 대가니 절에서 도선의 이름을
빌려 자기 절의 품격을 높이려 한 것이죠. 신계사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절의 창건을 법흥왕 때까지 끌어 올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런 일은 사찰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 나라들이 자기의 역사가 유구하다, 하늘의 자손이다 등등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다 비슷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 일부에서도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를 한없이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그럼 실제 신계사는 언제쯤 세워졌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지금으로서는 몇 년 전 남과 북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신계사를
발굴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신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은 신계사 3층 석탑입니다.
공동조사 결과 9세기 후기 신라 말 양식의 탑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대체로 후기 신라 말쯤에는 신계사가 제법 규모를 갖춘 절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
| ▲
복원된 신계사 대웅전. 가까이서 보면 지붕이 날듯이 가벼워 보여 다른 느낌이 듭니다. |
|
| ⓒ2005 백유선 |
| 신계사의 이름에 얽힌 두 가지 전설
본래
신계사는 본래 새 신(新)자를 써서 신계(新溪)사라 하였는데, 지금의 이름은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계(神溪)사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치게 된 데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계사 앞개울에 연어 떼가 알을 낳기 위해 올라왔기 때문에 이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지 않으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죠.
어느 날 신계사의
주지가 동해의 용왕에게 요청하여 연어 떼가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신통하게도 연어 떼가 올라오지 않아 절의 이름을
'신기한 계곡'이라는 뜻의 신계(神溪)사로 고쳤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기록에는 그 스님이 신계사를 세운 보운스님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귀신 신(神) 닭 계(鷄)자를 써서 신계(神鷄)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입니다. 이 절에 있던 한 스님이 새벽마다
목욕재계하고 부처 앞에 예배하는 것에 감동한 부처가, 새벽이면 절 남쪽의 바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게 하여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계(神鷄)사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전설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전설이 왜
만들어졌으며,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언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살생하지 말라'는 불교의 계율을 전설을 통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뒤의 것은 승려가 용맹정진 수행하는 모습을 내세움으로써 수행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찰에 전해지는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그곳에 사찰을 세우게 된 이유를 밝힌 연기설화가 대부분입니다. 가끔은 불교의 교리를 강조하거나 수행공간으로서 사찰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계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그런 종류의 것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신도들에게 불교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교훈적으로 엮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
| ▲
금강산 문필봉. 신계사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문필봉은 붓을 세워놓은 모양이라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의 승려생활
신계사에
대해 살펴보면서, 항일 독립투사였던 홍범도가 이곳에서 승려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서 눈여겨 살펴보았습니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여, 이순신, 서산대사 등을 알게 되고 항일감정을 키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서 한
획을 그은 봉오동전투의 명장인 그가 이곳에서 승려생활을 했다는 것이 새로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승려생활은 순조롭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비구니
스님과 눈이 맞아 결국 환속하게 된 거죠.
파계와 환속을 했으니 불교에서 보자면 아쉬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이곳에서 항일정신을
길러 독립군이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일제 식민지 시기 일부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불교 교단의 중심 인물
중에는 친일을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홍범도는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끈 대한독립군이 1920년 만주의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우리 항일 독립전투사상 최초의 부대단위 전투에서의 큰
승리였습니다.
그동안 청산리 전투의 영웅하면 김좌진만을 떠올렸으나, 사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의 승리였습니다. 최근 들어 홍범도가 재조명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로 보입니다.
우리 독립 운동가들이 사찰에 숨어들었거나 또는
사찰에서 머문 경우는 가끔 알려져 있습니다. 김구가 공주의 마곡사에 은거했다는 이야기나, 한용운이 백담사에서 수도하며 '님의 침묵'을 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여기에 신계사에 홍범도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홍범도는 북한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독립투사입니다.
 |
|
| ▲
신계사의 옛 모습. 일제시기에 찍은 사진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게시판을 재촬영한 사진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남한승려가 지키고 있는 신계사
현재의 신계사에서
옛 영화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신계사는 본래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에 들어갈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그 터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태백산맥 일대의 사찰들이 한국전쟁 중에 잿더미로 변하고 만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백산맥은 인천상륙작전 후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들의 퇴각로이었고 근처의 사찰들은 그들의 피신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대부분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위기를 넘긴 사찰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오대산 상원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지 않은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입니다.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기 직전 방한암 스님이 자신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겠다며 버틴 결과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계사는 금강산의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포화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최근까지 그 터만이 남아 전쟁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조가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는 어향각도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나마 비교적 온전한 유산이었던 신계사 3층 석탑마저 복원을 위해
해체 중이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절의 문으로 사용되었을 누문의 돌기둥이 지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흔적입니다. 그 외
자세히 살펴보니 새로 복원된 대웅전의 기단부에 일부 옛 돌 부재가 섞여 있었습니다.
 |
|
| ▲
신계사 누문의 돌기둥. 3층 석탑과 함께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신계사 대웅전의 기단. 옛 돌 부재를 일부 사용하여 복원한 모습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결국 이 정도를 통해 옛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제시기에 찍은 사진을 게시판으로 만들어 세워놓아 사진을 통해 예전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계사에서도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큰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내금강의 다른 불교 유적들을 볼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 봅니다.
최근 옛
모습을 되살리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 남한의 지원으로 복원된 대웅전이 산뜻한 모습으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신계사를
전면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의 관심 중 하나는 이곳에 오면 혹시 북한 스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남한 스님 한 분이 이곳에 거주하며 관광객들에게 신계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세워놓은 붓 모양을 닮은 문필봉을 가리키며 "금강산 문필봉의 정기를 받아 자제들이 공부 잘하기를 바랍니다"라며 관광객을
맞이하는 스님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북한 스님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습니다.
 |
|
| ▲
신계사는 남한 승려가 절을 지키며 안내를 해줍니다. |
|
| ⓒ2005 백유선 |
| 신계사를 구경한 후 둘째 날의 남은 일정은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교예
관람과 통일 체험 교육이었습니다.
교예공연은 전에 TV를 통해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에 박수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교예 도중에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촬영 통제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는 배우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대신 교예가 끝난 뒤 인사할 때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더군요.
학생들의
체험활동인 만큼 통일 체험 교육도 빠뜨려서는 안 될 내용이었습니다. 강사의 짧고 간결한 내용의 강의는 학생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또 금강산에서 하루 일정을 마쳤으나 피곤함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금강산이 준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
|
| ▲
교예공연 중에는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촬영을 금하고 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통일 교육장면. 강사는 보성중학교 강태광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계속됩니다)
둘째날
신계사를 마지막으로 구룡연 코스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지만,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금강산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계곡으로
유명한 이곳에, 왜 전혀 불교 유적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금강산이 불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은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과연 불교의 성지라 할 만했는지 기록을 통해 살펴
봅니다.
 |
|
| ▲
구룡연코스 초입. 이 코스에는 주차장 아래쪽에 있는 신계사를 제외하고는 불교 유적이 없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불교의 성지가 된 금강산
금강산에 세워진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해지는 절은 유점사입니다. 물론 현재 개방된 관광코스가 아니어서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유점사는 1세기
신라 남해왕 때 인도에서 띄워 보낸 53불상을 넣은 종이 도착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유점사본말사지>).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해지기 전의 일이니 만큼 대체로 전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내용과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파되기 이전에 이미 남방불교가 전해져 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구체적 증거가 없으니 추정일 뿐입니다.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입니다. 삼국시대에 불교는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진 만큼, 국가의 장려 속에 많은 절들이 세워집니다. 신비스런 산으로 이름난 금강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삼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많은 절이 세워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각 절의 '사적기' 등의 기록에는
고구려 장수왕 때부터 금강산에 절이 세워지기 시작하여 삼국 말기부터 신계사, 장안사, 건봉사, 표훈사 등이 차례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적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나 자료들이 거의 없으니 앞서 신계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부정하기도 어려우니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금강산에 본격적으로 절들이 많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후기신라(통일신라) 때부터의 일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8세기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우리 나라의 금강산으로
해석되면서부터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금강산의 절들은 더욱 국가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이름을 전하는 신계사,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등의 절이, 후기 신라 말에 비로소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계사
3층 석탑을 비롯해 이 시기의 유물과 유적들이 남아 있으니 확인이 됩니다.
일부에서는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했을 때
그것을 반대한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도, 신라 왕실과 왕실의 보호를 받은 금강산 사찰의 승려들이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비약이며 기록 그대로 은둔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
| ▲
구룡폭포와 ‘미륵불’ 글씨. 구룡연코스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불교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이는 1920년에 새겨진 것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자신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의 은덕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불교를 매우 장려했습니다. 이후 고려시대는 불교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이곳 금강산의 절들도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전기에 장안사에 지급된 토지만도 무려
1050결이나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른 절에도 수많은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었습니다.
특히 <고려사>에는 고려 후기
원나라 사신들까지 금강산에 들러 해마다 큰 불교 행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은 이미 동아시아의 불교 성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음이 확인이 됩니다.
심지어 충목왕 때에는 금강산의 유점사에서 행하는 불교행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영복도감'이란 관청을
따로 둘 정도였지요.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어느 때보다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
|
| ▲
겨울 금강산. 금강산의 구룡연 코스에는 온통 바위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산에는 흔한 마애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억불정책 중에도 비호를 받은 금강산
절
조선시대는 불교의 암흑기라 할 정도로 탄압을 받던 시기입니다. 많은 절들이 사라지고, 승려들은 천민의 대접을 받았으며
도성출입조차 금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의 절만은 예외적으로 정부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관련한 기사들이 많이 보입니다.
조선 초 사원정리 정책을 통해 수많은 사찰을 없애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던 시기에도 표훈사,
유점사 등 금강산의 절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토지를 지급하고 절을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유점사의 경우 이때 3000간이
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 그 정도였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어쨌든 대단한 규모였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 사찰에 지급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에 주기도 했습니다.
숙종 때에는 금강산 유점사에 하나의
전각을 설치하여 선조, 인조, 현종의 영정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를 올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로 보아 조선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정조 때에는 세조의 영정을 모신 표훈사를 수리해야 한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어향각을 신계사에 짓고, 또 절의 보수, 개축 등에 자금, 노동력을 대주는 등 금강산의 절들은 여전히 조선 왕실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공명첩을 지급하여 각 절이 이를 팔아 경비에 쓰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공명첩은 이름을 비워 놓은
관리 임명장입니다. 누구든 돈을 내면 공명첩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실제 관직은 아니지만 관리의 임명장을 받은 셈이니 이후 양반으로도 행세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결국 불교가 탄압 받던 시절에도 금강산의 절들은 왕실의 보호를 받았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중국 황제의 복을 빌기 위해 사신들이 금강산 사찰을 찾기도 했으니 그 또한 보호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
 |
|
| ▲
<증보문헌비고>에는 금강산에 모두 108개의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
|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이 시기 금강산에만 모두 108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기록에 나오는 암자들의 이름을 종합해 보면
무려 180여개나 된다고 합니다. 아마 단일 산으로서 이렇게 많은 사찰이 있었던 산은 금강산이 유일할 것입니다.
부처는 산이
생긴 지 훨씬 뒤에 태어났다
왕실의 보호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불교 탄압 정책을 추진하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것을 애써 부인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금강산을 구경하려 하는 명의 사신들에게 어째서
금강산을 보려고 하는지를 묻자 "금강산은 모양이 불상과 같기 때문에 보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답합니다. 이에 "산은 천지가 개벽할 당초에
이루어졌고, 부처는 산이 생긴 지 훨씬 뒤에 태어났다"(<태종실록>)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산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부처가 태어났는데 금강산이 불상과 같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내용입니다. 조선 초 억불 정책이 추진되면서 금강산과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사대부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중국의 사신들의 금강산 구경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태종은, "중국인에게는 '고려국에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원이라'하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하고 묻습니다. 이에 하윤은 "금강산이 동국(우리 나라)에 있다는
말이 <대장경>에 실려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하윤은, "본래 불교
경전의 금강산은 동해의 1만2천 보살이 살고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풍악산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며 잘못된
설"(<증보문헌비고>)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즉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우리 나라의 금강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불교를 비판하던 사대부들은 금강산이 불교와 관련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임금 앞에서는 기록대로 인정을 했지만, 본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금강산을
노래한 작품 속에는 유난히 풍악산, 개골산 등 금강산의 별칭이 많이 보입니다.
이곳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
결국 금강산은 우리 역사에서 심지어 불교가 탄압받던 시기에도, 불교의 성지로서 불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
왔습니다.
불교식 이름인 금강산이 금강산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금강산의 여러 봉우리들의 이름이 비로봉, 석가봉, 세존봉,
관음봉 등 불교식 이름으로 지어진 것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
| ▲
신계사와 관음봉. 신계사의 뒤쪽 봉우리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한 이름인 관음봉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동이라는 사신은 금강산 보덕굴에 이르러
"이곳이야말로 진짜 부처의 경지이다. 원컨대 여기에서 죽어서 조선 사람이 되어 오래오래 부처의 세계를 보았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소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율곡 이이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길산의 스승으로 알려진 운부가 금강산에서 승려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유명한 승려들의 수행처로서도 금강산은 이름이 높습니다. 특히 사명당과 서산대사가 이곳을 중심을 활동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성지였던 금강산의 절들은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문입니다. 한때 100여개가 넘었던 금강산의 사찰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된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현재의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로서보다는,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계속됩니다) |
여행 마지막 날은 오전만의 일정으로 해금강과 삼일포였습니다. 둘째 날과 마찬가지로 온정각에 모여 인원점검을 한
후 해금강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해금강은 북한의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통제선 안쪽이어서 인원점검은 훨씬 더 까다롭게
이루어졌습니다.
해금강까지 가는 길에는 근처의 북한 마을 여러 곳을 지나쳐야 합니다. 창밖으로 우리 시골 마을과 비슷한 규모의
온정리, 봉화리, 삼일포리 등의 마을을 볼 수 있습니다.
드넓은 고성 평야를 끼고 있는 이들 마을의 모습은 우리의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많이 다르게 느꼈을 사람도 있겠지만, 가급적 우리와 같은 모습을 보려고 했던 저의 눈에는 예전의 우리
시골마을처럼 정겨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
온정각 뒤의 온정리 마을. 온정리 마을과 금강산 관광특구는 이처럼 연두색 울타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북한의 시골 마을
고성평야의 논들은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함인지 모두 갈아엎어져 있었고, 예전 쟁기를 이용해 갈았던 우리 농촌의 논밭처럼 거칠게 갈려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트랙터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쟁기로 갈린 모습은 농사에 문외한인 저로서도 구별이 될 정도였습니다. 기계화되고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하는 남한의 논밭은 아직은 추수한 후의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곳은 벌써부터 다음 농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궁금했던 것은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서 대부분이 논이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전 우리의 농촌 같으면 지금쯤 보리
싹이 돋아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보리를 심지 않는지 그에 대한 해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이곳이 보리 이모작이 어려울 정도로 기온이 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뿐입니다.
개울에서 썰매를 타고 얼음지치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어렸을 때의 모습이 생각나 더
정겹게 보였습니다. 가끔씩 걷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영락없는 우리의 옛 모습이었습니다.
지나는 길에 여러 학교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소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방학을 마쳤는지 조회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삼일포중학교의 한쪽 벽면에 붙은 성적 소개판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을 모두 공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얼마 후면 어김없이 성적이 게시되었습니다. 희비가 엇갈리는
현장이었죠. 개인주의 성향이 깊어진 요즈음에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차에 탄 학생들도 이해할 수 없다며 신기해하였습니다.
북한
시골의 겉모습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 후의 모습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초가지붕을 없애고 슬레이트나 기와 등으로 지붕을 개량하던 모습
말입니다. 북한의 시골 마을들도 과거의 초가집은 이미 없어지고 모두 기와 지붕이었으며, 대체로 규격화된 같은 모양의 주택이
많았습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북한 사람들은 우리 전통의 색인 흰색을 여전히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벽면을 대부분
흰색으로 칠했더군요. 지난해 중국 연변에 갔을 때 조선족과 중국인의 주택을 구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벽면의 색깔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벽면이 흰색이면 대부분 조선족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의민족으로 흰색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이 아직 이곳 북한의 농촌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
|
| ▲
북한 남양의 모습. 중국의 도문에서 두만강건너 바라본 모습입니다. 흰색으로 칠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과연 이곳의 주민들은 금강산에 관광 온 남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들은 금강산 관광 사업으로 불편함은 없는 지 궁금했습니다.
구룡연 코스에서의 북한 여성안내원은 처음에는 주변에서 호기심을 보이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 익숙해져서인지 이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온정리 뒤쪽의 양지마을이란 곳은 본래는 지금의 온정각 주변의 마을이었는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집단 이주한
마을이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살던 터전을 옮겼으니 다소 불편한 점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게다가 가까이 있는 금강산에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것도 불편이라면 불편일 것입니다.
관광을 오는 남한 사람들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면서 위화감이 들기도 하겠지요. 이런 정도의
사소한 것 외에는 큰 불편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접할 수가 없으니 북한 주민의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강원도의 조세는 모두 절에 보내니
대신 과거의 금강산 주변 백성들의 생활은 어떠했는지 살펴봅니다.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이자 명승으로 모두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산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고통을 주는 산이었습니다.
옛 기록에는 고려, 조선시대의 금강산 주변 백성들의 처지는 어떠했는지, 그들에게 금강산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미 고려 말 공민왕 때 금강산 사찰의 불교 행사로 인해 백성을 피로케 하며 폐단을
일으키고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말 안축은 ‘금강산’이란 시에서 이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뼈만 남은 봉우리들 번쩍이는 칼이냐 창이냐 재 올리고 난 중들은 일없이 앉아만 있구나 산 아래 백성들의 고생살인
어떠한가 지나가다 때때로 절간을 보면 이맛살이 찌푸려지누나”
 |
|
| ▲
뼈만 남은 금강산 봉우리 |
|
| ⓒ2005 백유선 |
| 조선시대 금강산 주변 백성들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특히 왕실의 금강산 사찰에 대한 보호 조치와 불교행사로 인한 주변 백성들의 어려움에 대한
기사가 많이 눈에 띕니다.
조선 초 태종 때에는 금강산 승려들이 시주 받은 쌀을 운반하는 것을 보고 인근 관리가 이를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공공연히 속이고 꾀어서 백성의 식량을 많이 빼앗아 간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사찰 측은 이를
사헌부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그 관리는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종 때에는 “강원도는 땅이 메마르고 조세 수입이 적어 여러 고을의
군수용 곡식조차 부족한데, ‘세헌’이라 하여 조세로 거둔 쌀을 금강산의 절에 운반하여 바치고 있으니 백성의 피와 땀을 쓸데없이 중들에게 버리는
것”이라 하여, 이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미 세조 때부터 실시되어 온 금강산 사찰에 매년 곡식과 소금을 주는 제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임금과 신하가 같이 모여 공부하고 정세를 토론하는 경연에서조차 “강원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이 적어 해마다 흉년이 더한데, 금강산 여러 절의 세헌미 2백 석을 없애야 한다”고 하자 성종은 “선왕 때의 일을 어찌 경솔하게
없앨 수 있겠는가?”라며 거부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폐지 요구는 계속됩니다.
“강원도의 조세는 모두 절에 보내니, 관에서 거두는
것이 없습니다. 또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일 동안 머물렀는데 군수용 곡식이 동이 났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흉년이니, 남은 것이
있겠습니까?”며 계속 요청하자 임금도 거부하기가 어려웠는지 결국은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군수용 곡식마저 바닥나고,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조세를 모두 금강산의 사찰로 보내고 있었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관리들의 눈에 비치는 것이 이 정도였다면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먹는 자는 중이고, 이를 바치는 자는
백성”
나중에는 금강산 절에 지급되는 소금까지 문제를 삼게 됩니다. 사찰에 줄 소금을 곡식으로 바꾸어서 군수 물자에
보충하도록 하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임금은 역시 선대로부터 주어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이제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되어, “강원도는 토지가 메마르고 백성들이 가난한데도 유점사 등에 1년에 주는
소금이 2백여 석이나 되는데, 백성들에게 운반하여 바치게 한다. 만약 정한 수량에서 모자라면 백성들의 옷과 갓을 빼앗기까지 하고 관계되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하면서, 수량을 줄이거나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절에서 직접 받아가게 한다면 백성들이 고생하지 않을
거라며 제도의 개선을 주장합니다.
단지 군수 물자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금강산 사찰들이 소금을 징수하면서 횡포를 부려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정한 수량을 채우기 위한 고통과 운반의 고통 중에서 운반의 고통만이라도 덜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입니다.
당시 조정에서도 금강산 사찰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러한 상소나 주장이 계속된 것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사대부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명종 때는 고성 군수가 상소하여 고성군의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에 의하면 고성군의 호수는 371호였으나 그중
부역할 수 있는 호수는 125호이고 그들도 상당수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주된 요인은 흉년 때문이지만 상소에서 제기한 문제 중에는 금강산
사찰에는 곡식을 사서 먹는 자가 없다며, “먹는 자는 중이고, 이를 바치는 자는 백성”이라며 금강산 사찰로 인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금강산 주변의 백성들은 사찰에 조세와 소금 등을 내야 했고, 사찰의 횡포 또한 만만치 않았으며, 그로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관리들조차 인정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산이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고장에 있어서
중국의
사신을 비롯한 양반관료들의 금강산 유람은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동안 그들을 대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신들의 경비는 대체로
강원도와 인근 고을에서 책임져야 했습니다.
특히 사신들이 먹을 진귀한 음식들은 근처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준비하도록 했기 때문에
더욱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수십 명에서 때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하는 것은 대강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심지어 사신들이 금강산 사찰에 공양하는 백미 등은 군수용 곡식을 쓰게 했으니, 인근 고을의 백성들은 나중에
그것을 채워놓기 위해 수탈을 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정부에서도 이미 크게 걱정했던 내용으로 사신들이 금강산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또 금강산에 유람 온 일부 왕족은 그 횡포가 심하여 지방관이 상소를 올려 죄를 물을 것을
요청하나, 왕족을 벌할 수 없다하여 그냥 지나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삼일포의 단서암은 이곳을 구경하려는 양반들 접대에 시달린
백성들이 글씨를 짓이겨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리했을 지 짐작이 갑니다.
 |
|
| ▲
삼일포의 단서암. 이곳을 구경하려는 양반들 접대에 시달린 백성들이 글씨를 짓이겨 물속에 처박아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
| ⓒ2005 백유선 |
| 바닷가 해안초소에서 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개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보다는 유명한 해수욕장 근처에서 근무하는 것이 낳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늘 근무도 철저히 해야 하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대장을 비롯해 상관들이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해수욕장 놀러
왔다가도 초소에 들르는 상관들도 있습니다. 상관들이야 그냥 한번 들러본 것이지만 근무자의 입장에서는 늘 긴장해야 되니 접근하기 힘든 인적이 드문
바닷가보다 근무하기가 훨씬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금강산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백성들에게는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금강산
주변의 백성들은 이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이 어찌하여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 고장에
있어서 이 고생을 시키는가?”(<신증동국여지승람>)
과연 지금의 금강산 주변 북한 사람들의 속마음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계속됩니다)
|
해금강은 관광의 출발지인 온정리에서 약 40여 분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비포장의 좁은
길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입니다.
해금강코스는 먼저 해금강을 구경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삼일포로 이동하여 구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전의 일정으로 해금강과 삼일포 두 곳을 감상하기에는 빠듯해서, 여유 있게 구경하기 어렵다는 것이 다소 아쉬운
점입니다.
‘금강의 바다 풍경’이라고 하는 해금강은 말 그대로 기암괴석을 바다에 옮겨 놓은 듯 아름답다는 이야기와, ‘해금강을 보지
않고서는 금강의 미를 알지 못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삼일포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민중들의 기원이 서린 장소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두 곳 모두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
|
| ▲
해금강 풍경 |
|
| ⓒ2005 백유선 |
|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
본래 해금강은
군사분계선 근처부터 고성의 총석정에 이르는 약 60여km의 구간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약 2km정도의 거리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해금강의 맛만 보는 셈입니다.
해금강 관광은 도대체 얼마나 경치가 좋으면 ‘바다의 금강’이라 부를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볼 수 있는 해금강 경치의 중심은 해만물상이라고 불리는 향로봉을 중심으로 한 지역입니다.
향로봉은 바닷가에 육지와는 거리를 두고 홀로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는데, 여러 무리들을 버리고 혼자 바다에 빨려 들어가듯 서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바닷가 주변 수많은 작은 섬들과 해안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
|
| ▲
해금강 전망대와 향로봉 |
|
| ⓒ2005 백유선 |
|
 |
|
| ▲
해금강 풍경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의 만물상 코스를 구경하지 못했으니 해만물상으로나마 만족해야
합니다. 향로봉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바위가 만들어낸 작은 금강산과 같은 오묘한 모습을 감상하며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기어이 참지 못하고 향로봉 주변에 호위하듯 서서 기이한 모양을 보여주는 바위에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보기도 합니다.
‘저건 촛대바위, 저건 고양이바위 아니 쥐? 어, 사람처럼도 생겼네.’ 안내해 주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도취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향로봉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바위틈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민족의 나무인 소나무입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의 절개와 지조가 있기에 금강의 바위가 더욱 빛난다는 생각은 이미 금강산에서도 가져본 적이 있지만, 향로봉의 소나무는 그런 느낌을 더
강조하는 듯 보입니다.
 |
|
| ▲
해금강의 기암괴석. 마치금강산을 조각해 놓은 듯합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해금강 향로봉의 소나무.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아쉽게도 향로봉 북쪽은 북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금지되어서 인지 그쪽의 절경이 더 눈을 사로잡습니다. 그 너머에는 해금강의 꽃인 총석정이 있을 것입니다. 총석정은 관동 팔경에
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곳은 관광 허용지역이 아니어서 가볼 수가 없습니다.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보이지도
않습니다. 바위틈에 삐죽이 포신을 내밀고 있는 북한군의 대포가 마치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유명하다던 총석정을 보지 못하니 이곳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해금강의 경치 감상을 방해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해금강 관광은 수백 명의
관광객이 주차장을 출발하여 바닷가의 풍경을 구경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입니다. 마치 도심지를 걷는 듯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에 차분히
구경할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충분히 느낄 만한 시간도 부족하고요.
옛 사람들은 배를 띄워 해안의 절경을 감상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결국 해금강은 제대로 보지 못한 셈입니다. 해금강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과연 금강산을 보았다고 할 수 있을지, 금강의 미를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제쯤이나 제대로 된 해금강 구경을 할 수 있게 될지….
여러 가지 아쉬움이 가슴 한쪽을 채운
채 차는 다음 목적지인 삼일포를 향해 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선의 놀이터 삼일포
이제 금강산
기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삼일포입니다. 삼일포는 호수의 경치로는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합니다. 또 관동팔경에 속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민중들의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원의 장소, 즉 매향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
|
| ▲
삼일포. 보이는 건물은 북한식당인 단풍관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삼일포 구경은 차에서 내린 후 곧바로 호숫가 쪽으로 내려가서 호수를 타고
돌다가 다시 봉래대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며 감상하는 코스로 이루어졌습니다. 호숫가에서 삼일포가 준 첫 느낌은 금강산과는 또 달랐습니다.
금강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작은 봉우리가 굴곡진 호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조용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금강산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바위산의 위용으로 오밀조밀하면서도 웅장한 맛을 주었다면, 삼일포는 그것을 삭혀주기라도 하듯 조용하고 아늑한 모습입니다.
금강산이 산의 위용으로 오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면, 삼일포는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금강산과 서로 대비되면서도 잘 어울리는 쌍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삼일포가 있기에 금강산의 기암괴석이 더 빛나 보이고, 금강산이 있기에
삼일포의 포근함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얼어붙은 흰빛의 호수만으로도 이런 느낌인데, 물빛마저 푸르렀다면 그 느낌은 더 컸을
것입니다. 호수를 보고 있노라면 옛날에 어떤 왕이 하루 동안 놀러왔다가 3일을 놀다 가서 삼일포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여기에 온 왕이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록이나 정황으로 보아 이곳에 온 왕으로는 신라 진흥왕이 생각납니다. 진흥왕은
영토를 확장하며 함경도에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두 순수비를 세웠으니, 이곳을 통해 지나갔을 가능성이 가장 많습니다.
다른 한 명은
조선의 세조입니다. 세조는 금강산에 온 적이 있는 유일한 조선의 왕이니까요. 둘 중의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어떤 왕’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아무래도 기록이 분명한 세조보다는 진흥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완전한 추측일 뿐입니다.
조선 중엽의
문필가인 양사언이 공부를 하였다는 봉래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삼일포 경치의 최고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 이곳을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삼일포에 오면 반드시 배를 띄웠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보는 호수의 경치가 더 으뜸이었다는
이야기겠지요.
봉래대에서는 북한 여성 안내원이 삼일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한꺼번에 몰려드는 많은 사람 때문인지
그녀의 설명은 짧고 간결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
|
| ▲
봉래대에서 내려다본 삼일포. 북한 안내원의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사연을 간직한 바위섬
삼일포의 아름다운
경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호수에 떠 있는 섬들입니다.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와우섬이라고 이름 붙은 큰 섬을 비롯해, 3개의 작은
바위섬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 중 사선정은 말 그대로 정자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옛날에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 등 네 명의 신선들이 삼일포에서 놀다간 것을 기념해 세운 정자라 합니다.
네 명의 신선은 화랑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서 살핀 융천사의 ‘혜성가’에 보면 화랑의 무리들이 금강산에 유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본 것입니다. 화랑들이 신선처럼
명산대첩에서 심신을 수련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 작은 바위섬인 단서암은 말 그대로 붉은 글씨가 쓰여 있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에 따라 ‘술랑의 무리와 남석행’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술랑의
무리가 남석에 오다’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
|
| ▲
삼일포의 사선정과 단서암 |
|
| ⓒ2005 백유선 |
|
 |
|
| ▲
삼일포의 연화대 |
|
| ⓒ2005 백유선 |
| 그런데 이곳을 찾아온 양반 관리들이 늘 이 글씨를 보려고 했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이들을 접대하느라 시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단서암을 짓이겨 물속에 처박는 바람에 지금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삼일포에 온 옛 사람들이 배를 띄워 구경하려고 했던 것이 단순히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매향비는 단서암의 꼭대기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매향비는 글자그대로 향을 묻고 세운 비석을
말합니다.
옛 사람들이 왜 향을 묻고 비를 세웠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륵의 출현을 기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미륵은 말세가 되면 이 세상에 내려와 어려움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해 준다는, 기독교로 말하자면 메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
민중들은
그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소망하며 향을 묻고, 그들의 소망을 담은 매향비를 세웠던 것이지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은밀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많아서 매향비가 발견된 예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중들은 이미 삼국시대 이래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이
출현하기를 기원했습니다. 궁예와 같은 이는 이를 이용해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기도 했지요.
조선 후기가 되면 구원자 미륵은 마을로
내려와 동네 어귀의 못생긴 불상으로 조각되기도 합니다. 이 못생긴 미륵들은 말세에 나타날 구원자 미륵이라기보다는, 민중과 함께 하며 민중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작은 소망의 대상이었습니다.
 |
|
| ▲
삼일포의 장군대와 충성각. 북한에서 만든 것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결국 삼일포는 그 유명한 경치로 인해 유람의 대상이 되는 곳이기도 했지만, 이 지역 민중들의 바람과 소망을 담은 신비스런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이곳이 그런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북측 안내원의 설명에서도 매향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거리가 있는 사연 있는 장소를 좋아합니다. 그런 만큼 섬까지 가볼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짧은 시간의 삼일포 구경을 끝으로 아쉬운 금강산 기행을 마치면서,
이곳에 매향비를 세운 사람들의 심정으로 기원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져 달라고, 또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을 물리쳐
달라고….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사적이나 명승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모두 돌로 만들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현대가 금강산관광을 시작하면서 만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적이나 명승을 설명하는 안내판이야 당연히
세우는 것이니 논의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대개 철판으로 만들어 세워놓은 것에 비해, 금강산의 것은 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다소 다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은 이른바 '현지지도표식비'라고 하는 기념비입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을 방문하여 지시하거나 교시한 내용을 새겨 비석처럼 세워놓은 것으로 줄여서 표식비라고 합니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방문기념비나 현판에 글씨를 남기기도 합니다만 이런 종류의 표식비는 처음이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
|
| ▲
삼일포 현지지도표식비.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47년 9월 28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1981년 6월
16일 여기 삼일포를 찾으시어 경치 아름다운 이곳을 근로자들의 문화 휴식터로 더 잘 꾸릴데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였다."
|
|
| ⓒ2005 백유선 |
|
 |
|
| ▲
구룡연코스 입구의 현지지도표식비. 남한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촬영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길이 전하는 또 하나의 불멸의
기념비"
1984년 북한에서 발간된 <금강산의 력사와 문화>에 의하면 외금강에 11개소, 내금강에 8개소,
해금강에 3개소에 현지지도표식비가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금강산 기행 중에 본 것들도 모두 이보다 전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현재도 그 숫자는
이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표식비에 대한 이 책의 서술은 북한에서 표식비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강산 지구에 세워져 있는 현지지도표식비들은 어버이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이
지구를 현지 지도하시면서 우리 인민들에게 돌려주신 뜨거운 사랑과 크나큰 배려를 위대한 사랑의 서사시로 아로새겨 길이 전하는 또 하나의 불멸의
기념비이다.
즉 북한에서 현지지도표식비는 '불멸의 사적'으로 후손에 길이 전할 노동당시대의 기념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 주의사항 중에는 표식비에 올라서거나 손가락질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불멸의 사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인데 이를 모독하는 행위는 당연히 그들의 심기를 흐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친일시비에 휘말린 대통령의 현판이 강제로 철거되는 모습이 뉴스가 되고, 광화문의 현판 문제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방문해서 민박했다는 한 마을의 방문기념비는, 이미 오래 전 옛 5·18광주민중항쟁 묘역 입구의 발판으로 전락해 방문자의 발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
|
| ▲ 옛
5·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 묘역 입구의 발판으로 전락한 전두환 전 대통령 방문기념비. 1993년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현재는 옛 묘역 곁에
5·18국립묘지를 새로 조성했습니다. 이 돌의 행방은 알지 못합니다. |
|
| ⓒ2005 백유선 |
| 표식비는 이처럼 남한에서 일부 정치지도자의 현판이나 방문기념비가 천대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체제의 차이에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고, 정치지도자를 보는 눈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재임 중의
업적에 대한 평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평가는 역사가 내려주리라고 믿습니다.
표식비의 교시 내용은 금강산을 문화적
휴양지로 잘 꾸미라는 내용을 비롯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을 방문하여 언급했던 내용들입니다. 김 주석은 이미 북한에서는
신격화된 존재니 그들이 보면 교시 내용을 적어 표식비를 세우고 성역화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 관광객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관찰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표식비 근처는 호기심 속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장소가 됩니다. 그것도 맨 처음에 보이는
표식비가 특히 관심의 대상이 될 뿐 나중에는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슴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금강산의 구룡연 코스에서는 주차장에서 구룡폭포까지 모두 5개의 현지지도표식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주차장을
출발하여 얼마 가지 않아 맨 처음에 나타나는 표식비는 김일성 주석이 김정숙을 회고하였다는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
|
| ▲
구룡연코스 입구의 현지지도표식비.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어버이 수령님의 점심식사가 못내 념려되시여... 이곳에서 걸음을
돌리시였다. 존경하는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이후에도 끝내 금강산을 다시 찾지 못하시였다.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1973년 8월 19일 금강산을
찾으시였을 때 김정숙동지의 고결한 충성심에 대하여 가슴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
|
| ⓒ2005 백유선 |
| 김정숙(1919∼1949)은 김 주석의 첫째 부인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입니다. 김정숙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동단에 가입하여 반일활동을 하였으며, 1933년에 공산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5년 9월에 항일유격대에 가입하여 1936년 이후
김일성이 지휘하는 항일연군 제1로군 6사에서 활동하였으며, 제1로군 6사가 주도하던 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위해 공작원으로 장백현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1940년 10월 23일 김일성부대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만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이동할 때도 김일성과 함께 있었고,
그들은 이 국경을 넘기 직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에서 김정일과 둘째 아들(전쟁 전에 익사)을 출산하였다. 광복이 되자
여성 유격대원들과 1945년 11월 25일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왔다. 1949년 9월 22일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김 주석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으며, 결국은 서로 결혼한 인생의 반려자이자
동지였으나 3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회고하였다는 표식비는 앙지대에도 또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특히
앙지대는 김 주석이 김정숙을 회상하였다고 하여 회상대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로 보아 김 주석의 김정숙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
| ▲
앙지대 현지지도표식비. 김정숙을 회고하였다는 내용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그 외 목란관을 지나 두 번째로 만나는 표식비는 "조국 통일의 역사적
위업 수행을 위한 강령적 교시를 주신 곳"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는 통일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강문 앞의 표식비는 "금강문을 지나야 금강산 맛이 난다"고 하여,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입니다.
금강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내용의 표식비로 생각되었습니다.
옥류동의 표식비는 경치에 반해 감탄하다 보면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에는 김 주석과 김 국방위원장이 방문했다는 사실은 적혀 있으나 다른 것과는 달리 교시한 내용이 없이 그냥 "뜻 깊은 사적을 남기시었다"라고만
되어 있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
|
| ▲
목란관 위의 현지지도표식비.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973년 8월 19일 조국통일의 력사적 위업 수행을 위한 강령적
교시를 주신 곳" |
|
| ⓒ2005 백유선 |
|
 |
|
| ▲
금강문 앞 현지지도표식비.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73년 8월 19일 몸소 여기 금강문을 지나시며 '이 금강문을
지나야 금강산 맛이 납니다'라고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
|
| ⓒ2005 백유선 |
| 또 구룡연의 표식비는 "금강산을 세계 명승지로 더 잘 꾸밀 데 대한
강령적 교시를 주시었다"는 내용입니다. 삼일포에서 본 표식비도 마찬가지여서 "경치 아름다운 이곳을 근로자들의 문화휴식처로 꾸릴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주시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즉 이 두 곳의 표식비는 금강산을 잘 보호하고 가꾸어 휴양지로 만들라고 교시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내용 중에 다소 신기했던 것은 남한에서는 예전에 사용하다 이제는 그다지 쓰이지 않는 '근로자'란 말이 북한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남한에서는 근로자 대신 노동자란 말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 ▲
옥류동의 현지지도표식비. 다른 표식비와는 달리 교시한 내용 없이 그냥 "뜻 깊은 사적을 남기시었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구룡연의 현지지도표식비. 금강산을 세계적 명승지로 만들자는 내용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명제비와 영생탑
표식비 외에 또 하나 명제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김 주석이나 김 국방위원장이 내린 명제 즉 명언이나 어떤 것에 대한 정의를 그대로 새겨 놓은
비입니다.
이번 금강산 기행 중에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구룡대에는 김 국방위원장이 "참으로 금강산은 우리 민족의 기상입니다"라고 한
말을 새겨 놓은 비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비석은 명제비라고 하여 현지지도표식비와는 구별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미사여구가 없는 이 비는
성격상 우리 정치지도자의 어록비와 비슷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금강산과 직접 관계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온정각 근처
온정리 마을 입구에는 '영생탑'이라 불리는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영생탑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쓰여
있어 김 주석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한다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회주의 체제에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영생'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다소 의아스럽기도 하고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정봉사소의 북한 봉사원에게 물어보니 영생탑은
'리'단위로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삼일포 가는 길에 보이는 여러 마을들에 이 영생탑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영생탑은 정면에서만 촬영이
허락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약간 옆에서 사진을 촬영하려다가 북한 군인의 제재를 받기도 했습니다.
 |
|
| ▲
영생탑.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
|
| ⓒ2005 백유선 |
| 이들 표식비나 명제비 그리고 영생탑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내려 보려
했으나,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북한 체제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짧은 소견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좀더 많이
알게 될 때까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계속됩니다) |
금강산 바위에는 예로부터 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앞서 살핀 금강문의 '금강문' '옥룡관' '칠선암'을
비롯해 구룡폭포 곁에 쓰인 '미륵불' 글씨는 지금은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감상과 고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위에 새긴
글씨들은 때로는 자연 경관을 훼손하는 것이라 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다녀간 것을 표시하기 위해 새긴 수많은 이름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
|
| ▲
삼일포의 연화대 아래의 바위에는 '조선로동당 만세' '우리나라 사회주의제도 만세'라고 쓰여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지금의 금강산에는 금강산이 생긴 이래 쓰인 글씨보다 더 많은 글씨가 북한
정부 수립 이후 새겨졌습니다. 바위에 새긴 글씨들을 북한에서는 '글발'이라고 합니다. 구룡연 코스를 따라 약 4km 정도를 가는 길에 수많은
'글발'들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니 크게 두종류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짧은 구호이고, 또 하나는 시나 노래를 새긴
것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먼저 짧은 구호에 대해 살펴봅니다.
"김형직 선생님 탄생 60돐 기념"
구룡연
코스를 걷다보면 앙지대에 못 미쳐 경치 좋은 바위에 거대한 규모로 쓰인 '지원(志遠)'이란 글씨를 처음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촬영한 사진을 확대해 살펴 보니, 그 곁에 작은 글씨로 '김형직 선생님 탄생 60돐기념 1954. 7'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 글씨가 쓰인
내력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글씨는 북한이 새긴 것 중에서는 유일한 한자 글씨이고 비교적 이른 시기에 새겨진 것입니다. 아마도
독립을 향한 '원대한 뜻' 정도로 번역되는 이 글씨의 주인공 김형직은 고(故)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할아버지입니다.
 |
|
| ▲
앙지대에 못미쳐 앙지다리 위쪽의 바위에는 '지원(志遠)'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그동안 북한은 김형직이 1917년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했으며,
조선국민회는 3ㆍ1운동을 전후해 가장 큰 반일 지하혁명조직이라고 평가하면서 김형직의 항일투쟁에서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남한의 학계에서는 김일성의 항일투쟁 문제와 함께 그 진위여부를 의심의 눈으로 보아 왔습니다. 비교적 객관적 정보를 싣고 있는 백과사전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김형직은) 1894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숭실학교를 마쳤고 1917년
3월 강동군에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했다.
북한의 문헌에 의하면 비합법적인 단체 조선국민회와 함께 학교계·비석계·향토계 등의 계를 결성하였고 중강·무송 등지에서
광제의원·무림의원·순천의원 등을 설립, 의료사업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 수립이후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아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인민병원 등이 설립되었다. 북한에서는 국가적인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된 자료가 모두 북한 것으로 한정되어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이처럼 그동안 남한에서는 김형직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듯한 묘사가 일반적이었고, 대개는 날조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김형직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그의 항일 투쟁은 경력이 거짓이 아님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무조건적으로 날조했다고만 보아왔던 우리의 시각을 다소 교정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체, 주체사상 만세, 속도전"
금강산의 바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내용은 엄청나게 큰
글씨로 새겨진 '주체' '주체사상 만세' '속도전' 등의 구호입니다. 다시 지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보여서 20세기 냉전시대가 금강산에 남긴
최대의 흔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었던 '원쑤' '침략자' '쳐부시자' 등의 부정적 어투가 담긴
구호들이 안 보인다는 점과 글씨에 색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됩니다.
 |
|
| ▲
온정각 뒤의 매바위산에는 거대한 크기로 '주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유일한 지도 이념은
'주체사상'입니다. 북한의 헌법과 조선노동당 규약에도 주체사상을 당과 국가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는 우리 학생 운동권 일부에도 열병처럼 스쳐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북한은 주체사상에 대하여 '혁명과 건설에서 주인다운 태도를
가지는 것, 즉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을 요구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는 지도적 지침은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970년대 말까지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른 것이 없으며, 다만 그것을 북한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능가하는 사상이라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즉 주체사상은 북한을
이끌어가는 유일한 사상이며, 그런 만큼 '주체', 또는 '주체사상'은 북한의 구호나 표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런
글씨들이 금강산에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북한은 금강산을 근로자들의 휴식처로 나아가 '만년대계의 혁명적 교양 장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
| ▲
구룡폭포 직전의 절벽에는 '주체사상만세'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또 자주 눈에 띄는 구호는 '속도전'입니다. 주체사상이 북한의 모든
분야의 유일한 지도이념이라면, 속도전은 경제적인 개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속도전은 1974년 채택된 사회주의 노력경쟁을
위한 공식구호로,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속도전을 힘있게 벌이자'고 하여, '경제건설에 있어서 속도를 중시한다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
|
| ▲
금강산온천에서 매바위산을 바라보면 '속도전'이란 글씨가 보입니다. |
|
| ⓒ2005 백유선 |
|
 |
|
| ▲
삼일포의 충성각 아래의 바위에도 '속도전'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조선아 자랑하자"
그 외 볼 수 있는
구호 중에는 김일성 주석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만세" "조선아 자랑하자. 5천년 민족사에 가장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수령으로 모시었던 영광을"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자" 등의 구호가 그것입니다.
북한에서 항일 혁명투사로, 사회주의 북한을
건국한 어버이 수령으로 추앙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른 구호들 속에 이런 내용의 글씨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일 것입니다.
 |
|
| ▲
만경다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절벽에 새겨진 '글발' |
|
| ⓒ2005 백유선 |
|
 |
|
| ▲
옥류동에 새겨진 '글발'. 내용은 이렇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 의해 이룩된 우리당의 빛나는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키자"
|
|
| ⓒ2005 백유선 |
| 김일성의 공식 직함은 주석이지만 북한에서는 흔히 '수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수령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단순히 무리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북한에서는 '근로인민대중의 최고 뇌수이며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혁명의 지도자이며 '가장 위대한 영도자'로 추앙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수령은 오직 김일성 혼자이며,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후계자인 김정일마저도 수령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북한에서 수령은 절대적이며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우리의 관점으로는 당연히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해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방식대로 사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이 없습니다.
 |
|
| ▲
삼일포의 봉래대로 오르는 길에 새겨진 구호 |
|
| ⓒ2005 백유선 |
| 북한사회 이해의 실마리로 삼아야
우리도 예전에는
마을 곳곳에 '반공' '방첩' '멸공' 등의 구호를 써 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위에까지 새긴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요즈음에는 구호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후진성을 탈피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체로 구호가 많은 것은 후진성의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됩니다. 즉 금강산 바위에 새긴 구호들은 북한이 아직은 여러 면에서 후진적인 상태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구호가 필요하고 또 통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
|
| ▲
삼일포의 단풍각 앞 바위에는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키자'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
| ⓒ2005 백유선 |
|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이나, 국제적인 고립 상태는 북한도 인정하고, 우리도 인정하며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무리 북한의 체제와
입장을 고려하며 살펴본다 하더라도 바위에 거대한 글씨를 새긴 일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너무나 거대한 글씨들이 많아서 다시 지우려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역시 엄청난 자연 파괴를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이미 새긴
것이니 북한이 구호를 새긴 목적대로 후진성을 탈피하여 좀 더 생활 수준이 향상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수많은 남한 관광객들이 이를
보며 비난합니다. 물론 이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한마디 던지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대안이 없는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은 남북의 장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전에는 무조건적인 비난을 토대로 북한 체제의 붕괴만이 통일의 지름길이었다고 외쳤다면,
이제는 올바로 북한 사회를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의 허물도 보듬어 안고 가는 것이 통일의 대의를 향해 한걸음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서 살펴보면 금강산의 바위 글씨는 북한 사회를 분석하고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하는 이 '글발'들을 욕하기에 앞서 그것을 새긴 이유와 배경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는 이 기사를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쳐부숴 없애야 할 적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한편으로
우리와 함께 나아가야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계속됩니다)
 |
|
| ▲
옥류동 바위에 새긴 북한 노래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 바위에는 북한에 의해 새겨진 많은 '글발'들이 있습니다. 이전
기사에서 이미 표식비와 짧은 구호에 대해서는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구룡연 코스와 삼일포 코스에서 본 바위에 새긴 북한의 노래와 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노래와 시는 대체로 고(故)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인 김형직, 또 어머니인 강반석, 그리고 김일성 주석, 부인
김정숙 등의 항일 혁명 투쟁을 칭송하는 내용들이 다수입니다. 대체로 작은 글씨로 새긴 후 붉은 색칠이 되어 있습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북한은 금강산을 근로자의 휴양처로서 뿐만이 아니라 혁명적 교양 장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 혁명 역사를
중심으로 한 노래들을 눈에 띄는 적당한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고 합니다. 휴양 중에도 사상학습은 필요하다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
| ▲
바위에 새긴 북한의 노래들은 그다지 남한관광객의 시선을 끌지 못합니다. |
|
| ⓒ2005 백유선 |
| 구룡연 코스의 바위에 새긴 노래와 시
구룡연
코스에서는 금강문에 도착하기 직전에 노래를 새긴 '글발'이 처음 나타납니다. 남한에서는 이렇게 긴 노래 가사나 시를 적어 놓은 것을 보기
힘듭니다만, 이곳 금강산에서는 짧은 구호와 함께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짧은 구호들이 주로 금강산 바위 봉우리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비해, 노래 가사들은 길가 주변의 바위에 새겨져 있어서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호들은 큰 글씨이지만 노래 가사는 글자 수가
많아 작은 글씨로 새겨 놓았습니다.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이란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할머니인 강반석 탄생 70주년을 기념하여 1962년에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강반석은 조선국민회를
만들어 항일투쟁을 한 김형직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북한에 의하면 그녀 역시 남편과 그녀의 아들인 김일성을 도와 항일 투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김일성을 항일 투사로 길렀다고 하여 북한에서는 '조선의 어머니'로 불릴 정도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발은 강반석을
추앙하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구태여 그 내용을 모두 옮기는 이유는 이런 노래들이 북한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어머님의
사랑
효성어린 좁쌀 한말 앞에 놓고서 강반석 어머님은 말씀하셨네 나라 찾는 크나큰 위업을
위해 생명도 가정도 바쳐야 함을 아 위대하신 어머니 사랑 하늘땅에 비기랴 어머니 사랑
 |
|
| ▲
노래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 강반석 어머님 탄생 70돐 기념. 1962.4.21’ |
|
| ⓒ2005 백유선 |
| 이 바위의 뒷면에는 '푸른 소나무 영원히 솟아 있으리'라는 서사시의
일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시는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할아버지이며, 강반석의 남편인 김형직을 추모하는 시입니다. 이
글발은 조선국민회 창립 55주년을 기념하여 1972년에 새겼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전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김형직은 1917년
조선국민회를 창건하고 3·1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북한에서는 항일투사로 이름이 높습니다. 최근 우리 독립기념관에서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보관되고
있음이 알려져 그의 항일투쟁 사실이 거짓이 아니라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푸른 소나무 영원히 솟아
있으리 서사시 중에서
사람들이여! 무심히 쳐다보지 말라 금수강산 삼천리에 푸른 소나무가 그처럼 빛나고 그처럼
사시사철 푸르러 설레이는 것은 김형직 선생님의 높고 높은 그 원대한 뜻을 지니었기 때문이여라
 |
|
| ▲
서사시 ‘푸른 소나무 영원히 솟아 있으리, 조선국민회 55돐 기념. 1972. 3’ |
|
| ⓒ2005 백유선 |
| 이곳을 지나면 금강문 앞의 휴식터에 이르게 됩니다. 휴식터 한 편의 큰
바위에는 김일성 주석을 칭송하는 송가인 '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라는 노래의 가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탄생
60돌을 기념하여 1972년에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이때쯤 금강산에 본격적으로 글씨를 새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새겨진 글씨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기사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
있습니다.
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이 행복을
안겨주시려 한평생을 바치시는 우리 수령님 어버이 그 사랑 그 품속에서 오늘의 이 행복은 꽃폈습니다 하늘땅의 끝까지
따르렵니다 해와 달이 다하도록 모시렵니다 수령님의 그 은혜 길이길이 전하며 일편단심 충성을 다하렵니다. 위대하신 어버이
수령님을 우러러 인민들은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
|
| ▲
노래 ‘수령님의 만수무강 축원합니다. 수령님 탄생 60돐 기념. 1972.4.15’ |
|
| ⓒ2005 백유선 |
| 금강산의 글발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남한의 관광객들에게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 옆에 있는 바위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옥류동의 글발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옥류동의 경치의 아름다움 때문에 바위의 글씨에 눈을 돌릴 틈이 없습니다. 저도 옥류동의 글발들은 내려오는 길에야 자세히 살필 수
있었습니다.
옥류동에는 두 개의 노래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직 한마음'과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아'가
그것입니다.
'오직 한마음'은 1972년 김일성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북한의 표현에 의하면 "아름다운 조국 땅에서
어버이수령님을 높이 모시고 억년만년 행복하게 살아갈 우리 인민의 심정을 담은 노래"(<금강산의 력사와 문화>)라고
합니다.
오직 한마음
오늘의 이 행복을 그 누가 주었나 로동당이
주었네 수상님이 주셨네 김일성원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목숨도 바쳐가리 오직한 마음
 |
|
| ▲
노래 ‘오직 한마음. 수령님 탄생 60돐 기념. 1972.4.15’ |
|
| ⓒ2005 백유선 |
| '오직 한마음' 곁에 쓰인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아'는 금강산에서 본
글발 중에서 유일하게 정치색이 없었습니다. 1968년 북한 정부 수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이 노래는 다른 글발들과는 달리 가장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아 금강산 골안에 보물도 많네 비로봉
밑에선 산삼이 나고 옥류동 골안에는 백도라질세 아 인민의 금강산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네
 |
|
| ▲
노래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아, 공화국 창건 20돌 기념. 1968.9’ |
|
| ⓒ2005 백유선 |
| 비봉폭포를 지나면 나타나는 무봉폭포 곁의 바위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노래인 '김일성장군의 노래' 1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들은 한 번쯤은 불러 보았을 노래입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 점령 아래에서 이 노래를 배웠다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유신 시절 술 한 잔 마시고 무심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하며 흥얼거리다가 반공법에 의해 호된 고통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래 이 노래는 1946년
김일성에 바치는 헌시로 지어진 것에 곡을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여러 행사 때마다 불리는 노래로 사실상의 북한국가처럼 생각되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곁에는 '조선조동당 창건 기념. 1945. 10'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46년이니, 1945년이라 새긴 것은 조선노동당을 창건한 연대를 그대로 적어 놓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언제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금강산에 다른 글발들이 본격적으로 새겨진 1970년대를 전후하여 새긴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 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
|
| ▲
노래 ‘김일성장군의 노래, 조선로동당 창건기념. 1945.10’ |
|
| ⓒ2005 백유선 |
| 삼일포 주변 바위의 노래와 시
삼일포의 봉래대로
올라가는 길에는 '세상에 부럼 없어라'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습니다. 1972년 조선소년단 창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새긴 것입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였을 이 시의 내용을 통해 북한의 국정 홍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
하늘은 푸르고 내마음 즐겁다 손풍금소리 울려라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내조국 한없이 좋네 우리의 아버지 김일성원수님 우리의 집은 당의 품 우리는 모두다 친형제 세상에 부럼
없어라
 |
|
| ▲
노래 ‘세상에 부럼 없어라, 조선소년단 창립 25돐 기념. 1971.6’ |
|
| ⓒ2005 백유선 |
| 한편 삼일포의 봉래대 뒤편에는 피바위로 이름 지어진 바위가 있습니다.
북한에 의하면 이곳에서 미군에 의해 84명이 학살되었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피바위에는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1년에
새긴 글귀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글귀를 '애국자들의 심장소리'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원쑤는 이
한 몸 죽인다 해도 혁명의 절개를 꺾지 못하리 장군님이 이끄시는 혁명의 한길 죽어서도 그 길을 못
버립니다.
 |
|
| ▲
바위 글 ‘원쑤는 이 한 몸 죽인다 해도, 1971’ |
|
| ⓒ2005 백유선 |
| 피바위의 뒷면에 적기가가 새겨져 있다는 애길 듣고 있었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영화 <실미도>에 적기가를 부르는 장면이 삽입되어 국가보안법의 고무, 찬양 혐의로 고발되었다가 무혐의 처리되었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 시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다는 이 노래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늦어 서두르는 바람에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글발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충성각 주변에도 많은 글발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지만 역시 시간 때문에 직접 가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사는 모두 제가 직접 보고 촬영한 내용들로만
작성했습니다.
금강산 기행기의 한 편을 이 글발들로 채우는 것은 이전 기사에서 표식비나 짧은 구호를 소재로 하여 각각 한 편의
기사를 작성한 목적과 같습니다. 아울러 이런 글발들의 내용을 전부 실은 이유는, 이것을 통해 북한 사회의 단면을 조금이라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듬어야할 같은 동포이니까요.
물론 이런 글발이나 그 내용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라고 봅니다. |
겨우 2박 3일, 그것도 허용된 관광코스를 모두 보지도 못하고 금강산 기행기를 쓰다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되돌아보니 금강산의 눈곱만치도 보지 못한 채 금강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산과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껴안고 있지만, 그곳을 찾은 사람들은 늘 변하고 있다는 것을
금강산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겨울 금강산도 그런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듯 때로는 쓸쓸한 아름다움을 보이기도 합니다.
 |
|
| ▲
겨울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이는 금강산
계절의
변화가 그런 모습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는 사람의 아쉬운 마음이 금강산을 그렇게 바라보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달라진 것이겠지요.
민족의 명산 금강산은 사람과는 관계없이, 또 새로 더해진 인공의 흔적과는 관계없이 그 위용은 여전히 빛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금강산의 모습은 많이 달라집니다.
아직 우리는 마음이 편치가 못합니다. 마치 남의 나라에 온 듯 때로는 눈치를 보며 금강산을 감상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포를 만나면서 경계해야 하고 용어 사용을 신중히 해야 하고 또 그런 경외심으로 금강산을 보아야 합니다.
모르긴
해도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그 뒤에 많이 숨어 버렸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어렵게 보는 금강산이니 만큼 때로는 더 큰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여러 외적인 사정들이 금강산을 서로 다른 눈으로 보게 하고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편안하게 금강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될 지…….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대화하기 전에는 그토록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북한 사람들이 우리와는 문제없이 통하는 같은 민족, 같은 동포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분명 금강산이 또 다르게 보입니다.
 |
|
| ▲
겨울 해금강 |
|
| ⓒ2005 백유선 |
| 기행기를 쓰면서 염두에 둔 두 가지
금강산
기행기를 쓰면서 늘 염두에 두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다른 계절의 금강산은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으로는 많이 보았지만
직접 보지 못하였으니 그 느낌이 어떠할지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겨울 금강산과는 그 느낌이 전혀 다를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계절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부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습니다.
흔히 이야기되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주로 다른 계절의
것이었습니다. 꽃피고, 신록이 우거지고, 단풍이 드는 계절에는 또 다른 금강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라도 사정이 허용되면
계절에 따른 금강의 변화를 어떻게든 느끼고 싶습니다.
또 하나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금강산을
통해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금강산이 북한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우리의 한쪽인 북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눈으로 북한을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전선을 넘으며 본 북한 군인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금강산의 글발을 보면서는 북한에 대한 비난만을 늘어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한편인 북한에 대해 애정
없이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는, 우리의 앞길을 밝힐 희망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남쪽에서 생각했던 북한에 대한 편견을 이곳에서 더욱 굳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금강산 관광은 남쪽의 경제력을 북한에 과시하는 것으로 밖에는 다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금강산 관광으로 어떻게 해서 통일을 앞당길 수 있을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다수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 많은
학생들은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 어린 눈으로 북한을 보고 통일을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사물, 똑같은 상황을 보는 데도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전혀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안 없이 무조건적으로 비난만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고, 그들의 모습을 인정하며 보는 사람들에게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밝은 미래가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통일에 대한 희망은 다른데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통일의 대상이자 같은 동포인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냉전적인 사고 속에서는 그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
|
| ▲
겨울 금강산 |
|
| ⓒ2005 백유선 |
| 중학교 2학년의 금강산 체험 시 한 편
금강산
체험활동에 참여한 한 중학생의 시를 통해 미래를 발견했습니다. 겨우 중학교 2학년(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이제 3학년이 되었겠네요)인 이 학생은
전쟁도 냉전시대도 잘 모를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대가 보는 눈은 기존 세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이 학생은 휴전선에서는
안타까움을 보고, 남들이 두려운 눈으로 본 북한 군인에게서는 따뜻한 마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엇이 이
학생으로 하여금 그렇게 보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 어린 학생은 애정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한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학생의 시를 그대로 옮겨봅니다. 이 시의 문학적 완성도나 작품성을 말할만한 처지는 못
됩니다. 다만 다소 어설퍼 보이는 이 시 속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과 밝은 앞날이 보입니다.
그
곳에는···
금강산 그 곳에는 자연의 향이 살아가고 있고 봉래산 그 곳에는 폭포의 힘찬 물줄기가 살아가고 있고
풍악산 그 곳에는 붉게 노을 진 단풍이 살아가고 있고 개골산 그 곳에는 새하얀 눈이 살아가고 있다.
금강산 그 곳에는
낯선 사람들의 발자국도 있고 봉래산 그 곳에는 한국인이란 사람들의 땀방울이 떨어뜨리어져 있고 풍악산 그 곳에는 그리움의 눈물도
있고 개골산 그 곳에는 차가운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한민족’이란 단어가 있다.
금강산 그 곳에는 일만 이천 봉이
있고 봉래산 그 곳에는 구룡폭포가 있고 풍악산 그 곳에는 붉게 물든 나뭇잎과 졸졸 흐르는 물들이 있고 개골산 그 곳에는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인 눈 시린 경치들이 있다.
내가 다녀온 개골산 그 곳에서 나는 나의 뿌듯함이 깃든 자랑스러움과 철판
하나로 경계선이 되어버린 안타까움을 보는 내 심장의 눈물과 열심히 인사하는 나를 보며 웃어주며 손을 흔들었던 군인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금강산 그 곳은 많은 것을 알려주고 많은 것을 남기고 돌아가게 하는 우리 한국의
아름다운 ‘산’이다 (보성여자중학교 2학년 박 선미).
아쉬움을 뒤로하며 이제 20편째를 마지막으로 기행기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가 처한 복잡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금강산 기행을 통해 받은 나름대로의 교훈을 한 마디로 정리해 봅니다.
“산은 그대로 입니다. 이제 사람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 | | | |
| | | |